"권이 엄마 맞지요?"
지난 봄, 느티나무봉사단에 입회한 날, 어느 회원이 내게 건넨 첫인사였다. 스물다섯이나 된 우리 아이를 어찌 아는지, 초등학교 중학교 어느 때인지 아무리 봐도 초면같아 어쩔줄 몰라 하는 내게 다소곳이 "나 동규 엄마예요!"라고 했다. 그제서야 얼굴은 갸름해졌지만 눈, 코, 입매가 그녀의 옛 모습과 매치가 되었다. 그래도 그녀가 '동규'얘기를 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녀를 알아보기는 커녕 짐작도 못했을 것이다. 20대 시절 그녀는 통통했고 키도 훤칠해서 내겐 듬직한 언니 같았다. 그런 그녀를 지천명을 넘기고서야 봉사단에서 마주한 것이다.
25년 전. 공무원 아파트에 입주하면서 그녀를 만났다. 그 당시 공무원 아파트는 시청 공무원은 물론, 우체국, 소방서, 경찰서, 교육청 공무원들이 함께 입주해 살았다. 시청에 근무하는 남편들 덕분이었는지 우린 다른 이웃들보다 각별하게 지냈다. 임신시기도 비슷해서 둘 다 배가 불러 다녔고, 출산 육아 등을 겪으며 서로 의지가 되었고, 어떤 날은 남편들과 지내는 시간보다 둘이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우리는 잘 통했고 내색은 않았지만 그녀 얘기를 듣다 보면 나도 그렇게 해야지 라는 생각이 들만큼 좋은 친구였다.
내겐 첫 아파트 생활이기도 했다. 예전 단독주택과는 다른 문만 닫으면 독립이 되는 것 같은 공간의 편리함도 좋았다. 아파트지만 연탄보일러를 쓰던 시절이었고 갓난아기가 있는 집은 밖에서 보아도 단박에 알 수 있을 만큼 베란다에는 언제나 기저귀가 펄럭였다. 요즘과 가장 달라진 육아 문화라면 기저귀 문화가 아닐까 싶다. 하루에 20여개 씩은 나오는 기저귀 빨래는 힘들지만 하루도 게을리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삶아서 빨랫줄에 널어놓은 기저귀는 길게도 펄럭였다. 요즘 같은 가을 바람이면 기저귀의 춤사위는 보는 것만으로도 가을 하늘만큼 청량감을 더해주었다. 잘 마른 기저귀를 개어 놓으면 통장잔액처럼 든든한 기분이 되는 건 기저귀 빨래를 해본 엄마라면 공통적으로 느끼는 마음일 것이다.
박봉이던 시절, 근검절약은 몸에 배어있었다. 월급쟁이 아내로 길들여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가끔 그녀 덕분에 부업도 했다. 전자 부품을 조립하는 일거리가 더러 있었는데. 하루 이천원 벌이가 될까 말까한 일을 아이들을 돌보면서 했다. 어떤 날은 주문이 많다며 늦은 저녁에서야 산더미 같은 일거리가 왔고 그런 날은 아이를 재워놓고 밤늦도록 했다. 하필이면 그런 날 귀가가 늦던 남편이 일찍 들어와 성화를 부린 날도 더러 있었다.
출산 준비물이라야 기저귀 한 두 필 떠서 알맞은 크기로 자르고 시침질하여 삶아 두고 배냇저고리와 포대기면 다 인 시절이었다. 모유 수유에 백일이든 돌잔치든 무엇이든 집에서 했다. 남편과 아이들 시댁식구 친정식구 챙기느라 내 생활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힐링이 되어주던 사이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십대가 꽃이었다면 지금은 열매쯤 될까! 가난했지만 주어진 여건에 맞춰 살 줄 알았던 그때의 생활습관이 내 삼 사십대의 든든한 뿌리가 되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추억이 좋은 건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어디서나 소환이 가능한 것 아닐까. 그리고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 시절 내 모습을 그가 기억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는 미래의 어느 날 지금의 이런 날이 올 수 있을거라 상상도 못했다. 추억이 이토록 실감나는 건 그녀를 다시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느티나무에서 만난 그녀가 고향처럼 정겹다.
사람에게도 향기가 있다. 모임에도 향기가 있다. 봉사단에 들어와 또 다른 많은 선배 회원들을 만났다. 한사람 한사람 소중하지 않은 이가 업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하고 힘든 여정을 지내지 않은 이가 있을까. 그렇지만 지금은 남을 위한 일에 한 발 내디딜 준비가 된 이런 여건도 좋다. 그리고 함께 봉사활동 하면서 느끼고 배우는 건 봉사단 회원들의 몸에 배인 배려심이다. 지금 막 첫발을 내디뎠지만 앞으로의 시간과 인연도 기대가 된다. 25년 쯤 후 일흔이 넘으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오늘 지금이 소중한 것은 내일이 있기 때문이다.
-봉사단 입회 소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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