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자기성찰의 도구
자신의 과거라는 門 여는 것
자신이 쓴 글 배신하는 사람
글도 변했을 가능성이 높아
그 변화는 작은 것에서 시작
인터넷에서 ‘그 글’을 찾는 데에는 채 1분이 걸리지 않았다. 사건을 상세히 정리해 놓고, 한때 그에게 법원 문예상 대상을 안겨준 그 글의 전문(全文)을 실어 놓은 ‘친절한’ 네티즌이 여럿이었다.
2006년 법원행정처가 펴내는 ‘법원사람들’이라는 월간 소식지에 실린 그 글을 2012년에 찾아 읽은 적이 있었다. 당시 그는 부장판사가 되기 직전 거치는 고등법원 배석판사였고, 나는 같은 법원에서 재판연구원을 하고 있었다. 법원 내 이런저런 소모임에서 우연히 그 글 이야기를 두어 번 듣게 되었는데, 법원도서관 조사심의관을 역임한 잘나가는 판사가 글도 잘 쓴다니 부러움 반(半), 남부러울 게 없어 보이는 엘리트 판사가 한때는 매우 어렵게 살았다니 호기심 반(半)의 마음으로 직접 찾아 읽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부재(不在), 그리고 생계를 위한 직장 생활에 늘 지쳐있던 어머니 밑에서 느꼈던 결핍감과 서러움, 외로움이 절절하게 묻어났다. 마음 깊은 곳에 ‘찬 얼음덩어리’를 품고 살았기에, ‘울타리 한 곳이 무너져’ 있던 가정에서 자란 소년범들이 ‘찬바람에 마음이 꽁꽁 얼어붙어’ 법정(法庭)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묵은 상처 쑤시듯 다시 가슴 깊은 곳이 쑤셔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그 아이들 마음에 있는 얼음덩어리를 녹이려는 시도를 했던 재판 일화를 영화 감상기와 엮어 써내려간 그 글이 감동적이었던 이유는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기꺼이 드러내고 과거의 상처를 재판의 소중한 자산으로 삼았기 때문이리라.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의 소식지에 쓴 글일 뿐인데, 상을 받으려고 일부러 쓴 것도 아니고 그 상이 무슨 권위 있는 문학상도 아닌데, 그 글은 10년이 지나 법원 밖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며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나도 무리에 끼여 인터넷에서 검색한 그 글을 다시 읽었다. 유감스럽게도 이번엔 감동이 아니라 탄식뿐이다.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가지지 못한 것을 붙잡고 아파했던 과거를 돌아보며 소년범들에게 “돈보다 훨씬 더 귀한 것을 네가 가졌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너는 부자다”라고 말해 주었던 그는 상상을 초월하는 법조 비리 주인공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어쩌다 그의 삶은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자신의 글을 배신하게 되었을까.
흔히들 글쓰기를 ‘자기 성찰의 도구’라고 한다. 소설가 김영하가 ‘자기 해방의 글쓰기’라는 글에서 썼듯이, 글쓰기는 한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의 과거라는 어두운 지하실의 문을 열어젖히는 행위이다. 막상 커튼을 젖히면 의외로 별 볼일 없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두운 감정을 한 글자 한 글자 언어화하는 동안 우리는 우리 내면의 두려움과 편견, 나약함과 비겁에 맞서는 힘을 기른다.
그 글을 썼던 그때, 그도 그랬을 것이다. 최고 대학을 나온 엘리트였지만 남들에게 말하지 못한 ‘깊고 차가운 외로움의 근원’이 있었음을 썼던 그때, 커튼을 젖히고 나니 정말 ‘그 얼음덩어리가 뿜어대는 한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따뜻한 온기가 가득했음을 경험했을 것이다.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저간의 사정을 나는 전혀 모른다. 하지만 그가 변호사가 되고 나서는 그 글을 쓰던 그때처럼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감히 짐작해 본다. 다 지나고 보니 우리 사회를 뒤흔든 사건이 벌어져 있지만, 배신의 시작은 아주 사소한 순간이 아니었을까. 욕망이라는 또 다른 어둠이 마음속에서 서서히 세력을 확장해 가기 시작하는데, 불편함을 감추며 그 존재를 애써 외면하던 그 처음 순간이 있지 않았을까. 그런 날이 차곡차곡 쌓이던 어느 날 정신 차리고 보니 그 욕망이 자신의 전 존재를 잡아먹은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 아닐까.
일반 변호사들이 더 분노한다는 전대미문의 전관예우 사건을 보며 우문(愚問)을 던지는 이유는 나를 위해서다. 일상을 돌아보지 않을 때, 글이 멈춘다. 글이 멈춰지는 순간, 삶은 언제든 배신할 채비를 한다. 지나고 보면 상상도 못한 일이 벌어져 있을 수 있지만, 그 시작은 아주 평범한 사소한 일상의 순간임을 잊지 말기를.
-정혜진 국선전다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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