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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와의 분투 멈춘 한국 인문학의 대부 박이문

구름뜰 2017. 3. 28. 08:00

  

 

'한국 인문학 대부'박이문 교수 별세

'앎'을 향한 다양한 학문 분투 60년

"절대적인 건 없기에 지금 최선 가장 위대한 철학은 착함이다. "


철학·문학·예술 등 전방위에 걸쳐 왕성한 지적 활동을 보이며 세계적 명성을 쌓아온 '한국 인문학의 대부' 박이문(본명 박인희) 포항공대 명예교수가 26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87세. "세계관으로서의 철학이라는 건축활동, 그 동기와 건축구조는 새의 둥지 짓기와 같다"는 말 때문에 '둥지의 철학자'로 불렸던 이다.


고인은 1930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에서 불문학으로 학·석사를 받아 곧바로 이화여대 전임강사로 발탁됐지만, 안정적인 교수직을 버리고 프랑스 유학행을 택해 파리 소르본대에서 첫 한국인 문학박사로 이름을 올렸다. 이후 미국으로 또 건너가 철학 박사(서던 캘리포니아대)학위를 받을 만큼 '앎'을 향한 분투는 고인의 삶을 관통하는 절대적 가치였다


한편으로 고인은 창작자였다. 1955년 사상계에 시 '회화를 잃은 세대'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썼고, 2003년부터는 에세이를 꾸준히 펴냈다. 키에르케고르와 사르트르의 영향을 받아 실존주의·분석철학 등 난해한 현대철학에 정통했지만, 고인의 저서가 일반인에게도 널리 전파될 수 있었던 데엔 특유의 풍부한 문학성 이 있었다. "내 책엔 주어를 생략하지 않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란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제 3자가 아닌, 내 생각을 전달해야 피부에 와 닿고 독자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겠는가. 철학은 결코 어려운 게 아니다"는 게 고인의 생각이었다.
 

책에 둘러싸인 박이문 포항공대 명예교수. [중앙포토]

책에 둘러싸인 박이문 포항공대 명예교수. [중앙포토]


고인은 여태 100여권의 저작을 남겼다. "서른 넘어선 한해 최소 한권은 썼다"고 했다. 철학뿐 아니라 언어학·과학·종교·문명 등 외연을 계속 넓혀갔다. 특히 예술 분야에 대한 식견이 탁월해 일찍이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박이문 선생님이야말로 한국에서 유일하게 자기 이론을 가진 미학자"라며 경외심을 보이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는 『노장사상』『철학의 흔적들』『나비의 꿈이 세계를 만든다』『철학적 경영이 미래를 연다 』등이 있다.

학문적 깊이와 달리 일상은 소탈했다. 무더운 여름이면 선풍기에 속옷 차림으로 연구실에서 있는 모습이 여러 차례 목격됐다. 강학순 안양대 교수는 "20여년전 에피소드다. 조카 결혼 소식이 전해지자 '대략 비용이 100만원 정도는 드나'라고 해 주변이 웃음바다가 됐다. 공부 말고는 세상물정 전혀 모르는 천진난만한 양반"이라고 기억했다. 결혼은 55세에 했다. 

한국 인문학의 대부 박이문 교수. [사진 미다스북스]

한국 인문학의 대부 박이문 교수. [사진 미다스북스]


80대 들어서도 지적 호기심을 약해지지 않았다. 『더불어 사는 인간과 자연』등을 펴내는 등 환경 분야로 관심을 옮겨 생태중심주의를 주창했다. 이는 손자뻘되는 20대 어린 제자들과도 스스럼없이 토론을 즐기는 고인의 '수평적 일상'이 학문에도 그대로 투영됐다는 전언이다. 그러면서도 어떠한 것에도 절대적인 답은 없다는 허무주의자였다. "절대적인 게 없기에 지금 이 순간 몰입해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했다. 궁극적으론 "가장 위대한 철학은 '착함'"이라며 일상의 삶과 앎을 동일선상에 놓은 윤리행동가였다. 유족으로는 부인 유영숙 여사와 아들 장욱 씨가 있다.
최민우 기자 minwoo@joongang.co.kr

* 쉬운 문장은 아니지만 생전에 낸 '둥지의 철학'에 실린 글을 올려본다.

둥지의 철학 /박이문

내게는 모든 것이 줄곧 경이로웠고 또 현재도 그렇다. 나는 모든 것을 알고, 느끼고 설명하고 싶었다. 내가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한 지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나는 수많은 철학책들을 읽고, 다양한 철학사조와 철학자들과 접촉하면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모든 위대한 철학들이 잘 이해할 수 없거나 ‘재미있지만 말도 되지 않는 소설 같은 헛소리’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나의 지적 갈증을 시원스럽게 풀어주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런 갈증을 풀고자 하는 시도로 이 책『둥지의 철학』의 저술에 착수한다.”(19쪽)

박이문 철학의 결정판, ‘둥지의 철학’

이 책 『둥지의 철학』은 시인이며 철학자인 박이문의 주저(主著)이자 ‘박이문 철학’의 결정판이다. 한국 자생철학을 대표하는 우리 시대의 세계적인 석학 박이문이 평생에 걸친 시적ㆍ철학적 사유와 방랑 끝에 우리에게 제시하는 ‘박이문 철학’이 바로 ‘둥지의 철학’이다. 철학이라는 둥지는 시적 상상력과 유연성을 가진 기술로서의 예술적 솜씨를 필요로 한다. 결국 박이문이 말하는 ‘둥지의 철학’은 “철학적 시(詩)인 동시에 시적 철학의 글쓰기”인 것이다. 하지만 『둥지의 철학』은 2010년 세상에 나온 뒤 곧 절판되었다. 초판의 오류를 바로잡고 손질하여, 철학의 세계에 다시 둥지를 튼다. 한국 철학의 자생성과 독창성을 증명하는 『둥지의 철학』은 과감한 철학적 리모델링으로서 여전히 진행형임을 우리는 기억하고 탐구해야 마땅하다.

둥지의 철학자 박이문, ‘유레카’를 외치다

1974년 어느 날, 40대 중반이었던 철학자 박이문은 무릎을 치며 ‘유레카!’를 외쳤다. 언젠가 데카르트나 칸트 특히 니체처럼 철학에 코페르니쿠스적 그리고 마르크스적 혁명을 선동해 보겠다고 벼르던 그가 ‘존재 차원’‘의미 차원’이라는 개념적 폭탄을 제조한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일관성 있게 설명하고 싶었던 박이문이 찾던, 그리고 아무도 찾지 못했던 아르키메데스의 이론적 지렛대였다. 박이문이 발견한 이 새로운 철학적 개념은 이후 ‘존재 - 의미 매트릭스(the onto - semantical matrix)’라는 개념으로 변형되어 박이문의 철학관과 세계관의 바탕으로 사용되어 왔다. ‘존재 - 의미 매트릭스’는 박이문의 철학적 사유의 키워드인 것이다.


박이문은 1974년 발표한 논문 「시와 과학」에서 ‘존재 - 의미 매트릭스’의 개념을 처음으로 적용해서 시적 인식과 과학적 인식의 관계를 설명했고, 1980년에 출판한 『노장사상』에서 노장사상을 설명하는 데 사용했다. 그 밖에도 영어와 불어로 쓴 여러 논문에서도 이 개념을 적용하여, 메를로-퐁티, 굿맨, 데리다 등의 철학자들과 여러 철학적 주장들을 반박하는 데도 사용했다. 그러면서 박이문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논쟁이 계속되어 왔지만 풀리지 않는 많은 철학적 문제가 ‘존재 - 의미 매트릭스’라는 이 새로운 개념에 비추어 모두 새롭게 검토되고 풀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다.
둥지철학의 열쇠, ‘존재-의미 매트릭스’

“나는 10대 후반부터 시작한 시작(詩作)을 80대에 들어선 오늘날까지 계속하고, 30대 후반에 시작한 철학적 집필생활을 아직 계속하고 있다. ‘둥지의 철학’이란 이름을 붙인 이 책은 바로 모순되어 보이는 위와 같은 나의 양면적 정신적 충동이자 소망을 조화로운 세계관이자 동시에 인생관으로 통일된 하나의 시적 철학이자 철학적 서사시로 묶어보고자 한 시도이다.” (9쪽)

박이문은 이 책을, 양적으로 아주 적지만 핵심적인 철학적 문제가 모두 그리고 깊이 다루어지면서도 아주 간략하게 쓴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같은 책으로 구상했다. 즉 각주나 철학자들의 이름이 거의 나오지 않는 일종의 재야적, 즉 비강단적 철학서이다. 하지만 숱한 철학자들이 남긴 철학적 업적을 소홀히 해서가 아니라 이 책의 의도에 그들의 이름이 꼭 필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철학자들의 이름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이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박이문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의 고유한 구조를 ‘존재 - 의미 매트릭스’라고 이름을 붙이고, 지금까지 존재하고 앞으로 존재할 수 있는 다양한 세계관 즉 인간에 의한 자연적 및 문화적 우주에 관한 커다란 그림 지도들의 분류와 비판적 논평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존재 - 의미 매트릭스’는 기존과 미래의 모든 세계관은 물론 전통적으로 종교, 철학, 그리고 과학의 중요한 주장과 논쟁을 새로운 시각에서 이해하고 평가하는 잣대가 될 것이다.

둥지, 우주적 관념의 보금자리

존재 - 의미 매트릭스’의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우주는 하나의 마음과 몸의 따듯한 거처로서의 ‘둥지’이다. 박이문이 말하는 둥지는 시인의 감수성과 철학자의 직관이 빚은 철학적 메타포이다. 둥지는 감성이 이성이 절묘하게 만나는 공간이며, 우주의 고향이다. 곧 둥지의 철학은 ‘철학적 시(詩)인 동시에 시적 철학’이며, 존재와 의미의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하는 철학이다.


모든 것들이 일관성 있고 따라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무늬로 엮고 짜내는 것은, 새들이 수많은 종류의 재료를 종합적으로 사용하여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한없이 아름답고도 효율적인 둥지를 트는 작업만큼이나 복잡하고 어려우며 정교하고 세련된 건축술이 필요한 일이다. 이런 면에서 철학자들의 둥지건축술은 새들의 건축술에 비해 한없이 열등하다. 그럼에도 철학적 세계관이 일종의 관념의 둥지 짓기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철학이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고, 세계의 어느 것도 바꾸어놓을 수 없음을 안다. 그러나 철학은 세계를 밝히는 빛이다. 나는 철학의 실용성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이 세상을 보다 명확히 그리고 새롭게 보는 인간의 정교한 눈이며, 세계가 철학의 제품이라는 점에서 철학은 가장 실용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철학적 사유도 역시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ㆍ세계 속에 갇혀 있음을 안다. 그러나 철학적 사유를 하는 한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신이 태어나고 생존하는 사회ㆍ세계ㆍ자연을 초월하고 우주는 그러한 철학적 사유 속에 들어 있음을 안다.” (351쪽)

 

둥지의 철학은 그 자체가 미완의 우주이며,미완의 세계관이자 시작도 끝도 없이 열려 있는 세계다.둥지철학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근원적 차원에서 불확실하며,잠정적이며,상대적이며,중심인 동시에 주변이다.또한 모든 언어적 차별화는 본질적이 아니라 편의상의 잠정적인 경계선에 불과하며,처음이 곧 마지막이고,끝이 곧 시작이며,선형적이 아니라 순환적이며,죽음이 곧 삶이고,탄생이 곧 죽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