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요’의 장벽 안에 갇혀가는 단절의 시대
표현되지 않는 침묵에 대한 경청이 절실하다
사람의 말을 듣는다는 어려운 일 중에서 들리는 소리를 수동적으로 듣는 것은 비교적 쉬운 단계입니다. 청각기관을 통해 공기를 진동시키는 파장을 의지 없이 수신하는 피동성. 하지만 소극적 경청마저도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상대의 말을 온전히 듣기보다는 섣부른 조언을 하고 싶어 합니다. 우월한 입장에서 훈계하고 싶은 교만한 충동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대의 언어에 주의를 집중하기보다는 자신의 경험을 연결시켜 자신에 대해 생각합니다. 받아들인 언어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착각과 왜곡은 또 얼마나 많은지요. 게다가 악의를 가진 의도적 오역까지도!
다음 단계인 적극적 듣기(active listening)는 상대를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와 목적을 가진 듣기입니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신뢰 위에서 대화의 편안함으로 초대합니다. 대화의 주인공인 상대에게 주의를 집중합니다. 적절한 반응으로 때론 함께 웃고 때론 함께 울면서 공감합니다. 맥락과 상황을 고려하고 상대방의 관점에 서보기도 합니다. 다 표현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적절한 질문을 합니다. 말의 내용은 어떻게 흘러가는지, 어떤 말을 반복해서 강조하는지, 혹시 갈등 속에서 말의 일관성이 없지는 않은지 살핍니다. 언어의 조각들을 조합하고 그림을 완성하고 한 사람을 이해합니다. 듣기를 통해 관계는 형성되고 지속됩니다.
둘 사이의 대화는 상대적으로 쉬운 편입니다. 다자간의 대화는 또 다른 차원입니다. 사람들 간의 역동과 상호작용, 장소와 시간이 수많은 조합을 만듭니다. 누군가 더 주도권을 가지고 싶어 하기도 하고 사람 사이에 호감과 갈등이 혼재되며 말의 이해는 더욱더 복잡해집니다.
그래도 말로 표현된 것을 듣는 것은 그나마 쉬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표현 중 말로 표현되는 것은 대략 4분의 1 정도뿐이며 대부분의 표현은 비언어적으로 전해집니다. 표정과 몸짓, 자세와 시선, 호흡과 안색 등을 통해 많은 정보가 암호처럼 전달됩니다. 웃고 있는 입과 웃고 있지 않은 눈, 괜찮다는 입과 의기소침한 표정과 처진 어깨의 불일치. 좋은 관찰자가 되지 않으면 대부분 피상적으로 지나치는 복선입니다.
듣기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표현되지 않은 내면 의미에 대한 듣기이겠지요. 말로 표현되지 않는 의미,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는 감정. 말 없는 침묵에 역설적으로 내포된 수많은 말. 표현되는 말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내면에 남아 있습니다. 말이 없는 그곳에 가장 많은 말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의 침묵을 이해하기 위한 인내심은 희박해졌습니다. 촉박한 시간 속에 침묵을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말의 부재를 불안해합니다. 잠시의 쉼표가 어색해 불필요한 언어로 메꿉니다. 침묵 뒤에 이어질 진지함이 부담스러워 가벼운 말로 감추려 합니다.
기술로 보건대 가장 많은 사람과 가장 많이 대화할 수 있는 시대에 정작 대화가 줄어든 모순을 경험합니다. 그것은 모순이 아니라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감당할 한계를 넘어선 확장된 관계 속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의 역량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듣고 싶은 말만을 골라 ‘좋아요’를 누르고 듣고 싶지 않은 말에 분노합니다. ‘좋아요’를 기대하며 말하고 ‘좋아요’에 강화됩니다. ‘좋아요’의 장벽 안에 갇혀가고 있습니다. 벽은 점차 두꺼워집니다.
다음 단계인 적극적 듣기(active listening)는 상대를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와 목적을 가진 듣기입니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신뢰 위에서 대화의 편안함으로 초대합니다. 대화의 주인공인 상대에게 주의를 집중합니다. 적절한 반응으로 때론 함께 웃고 때론 함께 울면서 공감합니다. 맥락과 상황을 고려하고 상대방의 관점에 서보기도 합니다. 다 표현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적절한 질문을 합니다. 말의 내용은 어떻게 흘러가는지, 어떤 말을 반복해서 강조하는지, 혹시 갈등 속에서 말의 일관성이 없지는 않은지 살핍니다. 언어의 조각들을 조합하고 그림을 완성하고 한 사람을 이해합니다. 듣기를 통해 관계는 형성되고 지속됩니다.
둘 사이의 대화는 상대적으로 쉬운 편입니다. 다자간의 대화는 또 다른 차원입니다. 사람들 간의 역동과 상호작용, 장소와 시간이 수많은 조합을 만듭니다. 누군가 더 주도권을 가지고 싶어 하기도 하고 사람 사이에 호감과 갈등이 혼재되며 말의 이해는 더욱더 복잡해집니다.
그래도 말로 표현된 것을 듣는 것은 그나마 쉬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표현 중 말로 표현되는 것은 대략 4분의 1 정도뿐이며 대부분의 표현은 비언어적으로 전해집니다. 표정과 몸짓, 자세와 시선, 호흡과 안색 등을 통해 많은 정보가 암호처럼 전달됩니다. 웃고 있는 입과 웃고 있지 않은 눈, 괜찮다는 입과 의기소침한 표정과 처진 어깨의 불일치. 좋은 관찰자가 되지 않으면 대부분 피상적으로 지나치는 복선입니다.
듣기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표현되지 않은 내면 의미에 대한 듣기이겠지요. 말로 표현되지 않는 의미,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는 감정. 말 없는 침묵에 역설적으로 내포된 수많은 말. 표현되는 말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내면에 남아 있습니다. 말이 없는 그곳에 가장 많은 말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의 침묵을 이해하기 위한 인내심은 희박해졌습니다. 촉박한 시간 속에 침묵을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말의 부재를 불안해합니다. 잠시의 쉼표가 어색해 불필요한 언어로 메꿉니다. 침묵 뒤에 이어질 진지함이 부담스러워 가벼운 말로 감추려 합니다.
기술로 보건대 가장 많은 사람과 가장 많이 대화할 수 있는 시대에 정작 대화가 줄어든 모순을 경험합니다. 그것은 모순이 아니라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감당할 한계를 넘어선 확장된 관계 속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의 역량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듣고 싶은 말만을 골라 ‘좋아요’를 누르고 듣고 싶지 않은 말에 분노합니다. ‘좋아요’를 기대하며 말하고 ‘좋아요’에 강화됩니다. ‘좋아요’의 장벽 안에 갇혀가고 있습니다. 벽은 점차 두꺼워집니다.
경청, 소통, 공감, 배려 같은 단어들이 넘쳐납니다. 그러한 가치들이 부재하기 때문에 필요성이 높아진 것일까요, 아니면 단어들이 난무하기에 가치가 떨어진 것일까요. 경청이 사라진 시대이기에 경청이 요구되고 그 결과로 과잉된 경청이라는 단어가 그 가치를 식상하게 만드는 악순환 속에서 서로 간의 이해는 점차 사그라져 갑니다.
내면에 귀 기울이는 경청의 부재에 대한 반작용으로 조증사회는 끊임없이 소음을 생산합니다. 막스 피카르트의 말처럼 내면의 침묵하는 실체는 인간을 보호합니다. 그러나 침묵에 귀 기울이지 않는 탈침묵의 시대에서 침묵으로 간직되어야 할 내면의 진실이 소진되고 있습니다. 표현되는 말의 근저에 있는 침묵. 우리가 진실로 하고 싶은 말은 그곳에 남아 있습니다. 침묵하는 서로에 대한 경청이 절실합니다.
- 송인한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