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 몹시 괴로웠다
내 눈에 젖은 것이 혹,
너였는지 모르겠구나!
먼지 날리는 골목길에서
오지 않는 애인 지나가기를 기다리기
은행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하릴없이 땅바닥 내려다보며 낙서하기
공중전화 앞에서 동전 구걸하기......
가령, 부재를 통해서만 네가 내 안에 존재한다면
2
꽃눈들은 울기 직전 아이들처럼
제 속에 터져오르는 것들로 안간힘이다
겨울을 견딘 속엣것들의 참담한 몸짓
깨문 입술 같은 꽃눈 하나에
내 입술을 가만히 포갠다
네 뱃속에서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깊고 멀다
너는 맑은 샘이었으나,
춥고 어두운 골짜기를 거쳐온 것......
3
물안개에 산그림자 어둑해진다
어두울수록
잘 보이는 것들도 있다
컴컴해진 동공 속에 이미 등불이 있기 때문이다
결핍과 격리,
그것은 내 고향이다
들판 건너 서쪽 하늘 핏빛으로 저물고
방 안은 시나브로 어두워가는데,
너는 부재란 방식으로 내 안에 가득하다
살갑게 만져지기까지 한다
4
형체도 없는 잿빛 하늘
고속도로의 물바닥을 씹어대는
바퀴들의 끈질긴 울부짖음, 너는 그때 어디에?
참혹하여라,
빗속에 바들바들 떨고 있는 백목련 꽃잎들
고요히, 입 다무는 것들......
엄원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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