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수필

고요히, 입 다무는 것들

구름뜰 2017. 5. 17. 21:54

 

1

나, 몹시 괴로웠다

내 눈에 젖은 것이 혹,

너였는지 모르겠구나!

먼지 날리는 골목길에서

오지 않는 애인 지나가기를 기다리기

은행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하릴없이 땅바닥 내려다보며 낙서하기

공중전화 앞에서 동전 구걸하기......

가령, 부재를 통해서만 네가 내 안에 존재한다면




2

꽃눈들은 울기 직전 아이들처럼

제 속에 터져오르는 것들로 안간힘이다

겨울을 견딘 속엣것들의 참담한 몸짓

깨문 입술 같은 꽃눈 하나에

내 입술을 가만히 포갠다

네 뱃속에서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깊고 멀다

너는 맑은 샘이었으나,

춥고 어두운 골짜기를 거쳐온 것......






 

3

물안개에 산그림자 어둑해진다

어두울수록

잘 보이는 것들도 있다

컴컴해진 동공 속에 이미 등불이 있기 때문이다

결핍과 격리,

그것은 내 고향이다

들판 건너 서쪽 하늘 핏빛으로 저물고

방 안은 시나브로 어두워가는데,

너는 부재란 방식으로 내 안에 가득하다

살갑게 만져지기까지 한다



4

형체도 없는 잿빛 하늘

고속도로의 물바닥을 씹어대는

바퀴들의 끈질긴 울부짖음, 너는 그때 어디에?

참혹하여라,

빗속에 바들바들 떨고 있는 백목련 꽃잎들

고요히, 입 다무는 것들......

엄원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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