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시들은 있지만, 식욕은 없어요.
반지는 있지만, 이심전심은 없어요.
최소한 삼백년 전부터 쭉.
부채는 있는데 – 홍조 띈 뺨은 어디 있나요?
칼은 있는데 – 분노는 어디 있나요?
어두운 해질 녘 류트를 퉁기던 새하얀 손은 온데간데없네요.
영원이 결핍된 수만 가지 낡은 물건들이
한자리에 다 모였어요.
진열장 위에는 콧수염을 늘어뜨린 채
곰팡내 풀풀 풍기는 옛날 파수꾼이
새근새근 단잠을 자고 있어요.
쇠붙이와 점토, 새의 깃털이
모진 시간을 견디고 소리 없이 승리를 거두었어요.
고대 이집트의 말괄량이 소녀가 쓰던 머리핀만이
킬킬대며 웃고 있을 뿐.
왕관이 머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어요.
손은 장갑에게 굴복하고 말았어요.
오른쪽 구두는 발과 싸워 승리했어요.
나는 어떨까요, 믿어주세요. 아직도 살아 있답니다.
나와 내 드레스의 경주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어요.
아, 이 드레스는 얼마나 고집이 센지!
마치 나보다 더 오래 살아남기를 열망하듯 말이죠.
-쉼보르스카
박물관은 너무 엄숙해서 떠들던 입을 닫고 말지. 저 막제된 진열장 안의 것들이 자꾸 흘깃 쳐다보아 나 자유롭지 않아. 이상하게도 박제되었으나 움직이고 멈추었으나 꿈틀거리는 저걸 역사라고 부르는 건지. 그래서 박물관을 한 바퀴 휘돌아 나오면 시간여행을 한 것처럼 먼 과거로부터 현재까지를 다 보아낸 자의 피곤과 우월이 있기도 하네.
그러나 한편, 천 년 전에도 밤을 먹고 싸움을 했으며 사랑하고 이별도 했으니 그거 정겨운가 아니면 지긋지긋한가. 승리니 왕관이니 하는 것이 라며 부르는 개선가보다 암울한 '헤브라이 포로들의 합창'이 더 아름다운 건 또 왜일까.
어찌해도 역사란 피와 살육, 그리고 악다구니 삶의 총체이며 박물관이지만 그 상처와 꽃의 백화점일 터인데. 어쩌나 '접시는 있지만 식욕은 없고, 반지는 있지만 일편단심은 없'는 방부제 안의 저 정물들. 그러나 세세연년 살아남을, 허무해서 아름다운 우리 공동의 문화유산들, 믿어주세요 믿어주세요 하고 있네.-이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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