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문구를 읽을 때면 공연히 기분이 좋아진다. “이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본 매체의 견해와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곱씹을 여지가 있어 동의하지 않는 논리에도 목소리를 준다니. 이런 세련된 태도를 두고 ‘톨레랑스’, 즉 관용이라 하던가. 원고 주제를 주지하고자 전화를 걸었을 때 이 코너, ‘2030 세상’의 담당 기자가 그리 말했다. 미리 알려줄 필요 없으니 자유로이 선정하라고. 나는 그 심드렁한 관용에 감명받았고 이내 주제를 바꿨다. 그리하여 오늘의 이야기는, 이 코너의 ‘30’을 맡고 있는 내겐 세상에 관용할 수 없는 말이 참 많다는 것이다. 매체의 톨레랑스가 어째서 나의 편협함을 낳았느냐고? 사실 적잖이 청개구리 심보인 듯한데, 얻어 걸리듯 일종의 메타포로 읽힌다면 좋겠다.
나는 장애인 특수학교 설립에 맞선다는 일부 지역 주민의 말을 관용할 수 없다. 국내 사례를 통틀어 장애인 관련 시설이 집값이나 치안에 악영향을 미친 전례가 없으니, 그들은 실상 장애인 자체를 혐오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일부 기독교인이 성명, 집회, 행진에서 외치는 ‘동성애 반대’를 관용할 수 없다. 혹시 여태 누구도 그들에게 알려주지 않았을까 봐 고루한 설명을 남기자면, 개인의 정체성은 타인이 찬성하고 반대할 계제가 아니다. 나는 성폭력 피해자에게서 귀책사유를 찾으려는 일체의 논리를 관용할 수 없다. 그들은 ‘이런 말을 하고 다니다 구타를 당할 수도 있겠다’란 각오를 했을까? 각오했다면, 즉 ‘맞을 만한’ ‘성폭력당할 만한’ 사람이란 게 존재한다고 여긴다면 그는 현대 문명의 가장 큰 성취인 인권 개념을 미처 배우지 못한 사람이다. 각오하지 않았다면 그 논리는 명백한 여성혐오다.
한 사건으로 축약할 수 있겠다. 나는 강의실 내 여성혐오적 발언에 대한 세간의 의혹 제기가 ‘표현의 자유’와 ‘학습권’에 대한 침해라는 한 대학 교수의 주장을 관용할 수 없다. 그 말은 ‘예술가의 에고 트립’과 ‘위악’, 그리고 ‘표현의 자유’와 ‘혐오 발언’을 구분할 수 없다는 주장이나 마찬가지이니, 듣는 사람들을 바보로 여기는 것이 분명하다. 혹은 스스로 바보 흉내를 내고 있거나. 저들은 표현의 억압과 싸우는 투사들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이들의 존엄성을 마음껏 훼손하고선 그에 대한 비난, 즉 타인의 표현 자유는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강자가 자신의 혐오에 대한 ‘만능 방패’라도 되는 양 휘두를 때, ‘표현의 자유’란 말은 거룩하지 못한 채 오직 비열하다.
첨언. 서두에 쓰인 ‘이 글은 본 매체와의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문구는 사실 선의의 맥락에서만 쓰이진 않는다. 누군가의 억측이나 폭언을 인용하고선 중립을 가장하는 의도로 쓰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니 나는 상술한 사람들의 발언을 인용하며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현실적으로’ ‘일리가 있는’ 같은 표현을 덧붙이는 사람도 신뢰하지 않는다. 인터넷 게시판에, 단톡방에, 식당 옆자리에, 미세먼지 같은 혐오의 논리가 이토록 만연한 세상에서, 나는 도무지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성윤 잡지 에디터
한 사건으로 축약할 수 있겠다. 나는 강의실 내 여성혐오적 발언에 대한 세간의 의혹 제기가 ‘표현의 자유’와 ‘학습권’에 대한 침해라는 한 대학 교수의 주장을 관용할 수 없다. 그 말은 ‘예술가의 에고 트립’과 ‘위악’, 그리고 ‘표현의 자유’와 ‘혐오 발언’을 구분할 수 없다는 주장이나 마찬가지이니, 듣는 사람들을 바보로 여기는 것이 분명하다. 혹은 스스로 바보 흉내를 내고 있거나. 저들은 표현의 억압과 싸우는 투사들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이들의 존엄성을 마음껏 훼손하고선 그에 대한 비난, 즉 타인의 표현 자유는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강자가 자신의 혐오에 대한 ‘만능 방패’라도 되는 양 휘두를 때, ‘표현의 자유’란 말은 거룩하지 못한 채 오직 비열하다.
첨언. 서두에 쓰인 ‘이 글은 본 매체와의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문구는 사실 선의의 맥락에서만 쓰이진 않는다. 누군가의 억측이나 폭언을 인용하고선 중립을 가장하는 의도로 쓰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니 나는 상술한 사람들의 발언을 인용하며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현실적으로’ ‘일리가 있는’ 같은 표현을 덧붙이는 사람도 신뢰하지 않는다. 인터넷 게시판에, 단톡방에, 식당 옆자리에, 미세먼지 같은 혐오의 논리가 이토록 만연한 세상에서, 나는 도무지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성윤 잡지 에디터
* '얻어걸리듯 충분히 메타포'로 읽히길 바란다는 저자의 글이 매력적이다. 필력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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