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시인 박지영이 4번째 시집을 펴냈다. (평론집과 산문집까지 포함하면 7권)
시인의 세계는 이동하기 마련이다. 변태(變態)하고 이동할 수밖에 없는 시적화자의 운명을 고려하더라도 박지영의 변화는 이번 시집에서 도드라진다.
'아버지어머니/ 말 좀 들어보세요/ 제발 귀 좀 기울이세요/ 제 말은 제 말이 아니에요/ (중략)/ 저는 모든 걸 보았어요/ 어둠도 보았고/ 꺼지지 않는 불빛도 보았어요/ 아버지어머니/ 저는 할 말이 너무 많은데/ 아무도 제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아요/ (중략)/ 아버지어머니 차라리 제 입에서/ 개구리가 튀어나왔다면 믿으실래요?/ (하략)' -혀끝에서 맴도는 말- 중에서.
이 작품에서 시인은 시적 화자로 카산드라를 등장시킨다. 카산드라는 아폴론으로부터 예언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으나, 아폴론의 사랑을 거절한 벌로 예언을 말할 때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게 되었다.
시인이 자신을 대신할 인물로 카산드라를 불러낸 까닭은 무엇일까? 카산드라가 처한 상황에 시인 자신이 서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박지영은 사람들은 보지 못한 무엇을 보아버렸다. 그러나 자신이 본 것을 목이 터져라 이야기해도 누구도 알아듣지 못한다. 이 시에서 '아버지어머니'는 다른 인물로 대치해도 무방하다.
이번 시집에는 '달'이 있는 작품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그 달이 전통적 서정시에 나타나는 그리움이나 자연과 동일성을 이루는 소재로 쓰이지는 않는다. '달'은 어떤 시공과 또 다른 시공을 연결하는 구멍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달을 볼 수 있는 것은 밤의 어둠 덕분인 동시에, 달을 비추는 햇빛 덕분이다. 시인은 바로 그 빛과 어둠을 동시에 가진 달을 통해 자신이 보고 만 것들을 노래한다. (보게 된 것이 아니라, 보고 만 것이다)
시 '토마토가 익을 동안' '달의 혼인' '검은 말들' 과 같은 작품들은 빛과 어둠을 동시에 가졌기에 비로소 드러나는 '달'을 통해 시인이 보고, 듣고, 그래서 알아버린 것들을 울면서 토로하는 작품이다.
시인은 '달'에서 움직이는 뿌리, 영원으로 가는 시간, 멸망에 이르는 시간을 보았고, 구원으로 이르는 길이 있음을 알았다고 말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남들도 알아듣도록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박 시인은 "글은 패배한 기록일 더 설득력이 있다고 한다. 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전에는 틀을 중시하고, 포장에 치중했는데, 이번 시집에서는 내가 망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달콤해 혀에 감기는 것이 다 좋은 줄 알았지/ (중략)/ 이제는 입이 써/ 아무리 달달하고 부드러운 것도/ 혀를 달래지 못해/ (중략)/ 입이 소태같이 써/ 쓴맛이 생을 길들이고 있어' -입이 쓰다- 중에서.
박 시인은 근래 가족과 지인들의 죽음을 많이 접했고, 스스로 심리적인 죽음에 오래 빠져 있었다고 한다. 그 어둠에서 서서히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 변화가 이번 시집에 배어 있다.
이번 시집에는 꿈 혹은 신화와 연결한 작품들이 많다. 하지만 꿈이나 신화는 빌려왔을 뿐이다. 시인은 꿈과 신화를 슬쩍 흘리며 '겁도 없이 무시무시한 세월을 따라온 자신을' 그래서 발견한 '생의 누추에 화들짝 놀라고 있는 자신을' 보여준다. 121쪽, 9천원.
-조두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