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란한 대낮, 계단을 올라가는데 무엇인가 굵은실 같은 것, 아니 고무줄 같은 것이 반쯤 잘린 채 햇빛을 맞고 있었다. 뭘까, 고개를 수그리고 바라보니
지렁이였다. 누가 밟고 지나갔는지 반 토막만 남은것이었다. 아하, 어제 온 비에 길로 나온 것이었군, 가엾게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어버렸군, 그냥
지나치려는데 무엇인가가 길을 막았다, 그림자였다, 내 그림자,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내 그림자.
ㅡ 강은교 시집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