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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씻는다

하루를 나갔다 오면 하루를 저질렀다는 생각이 든다 내심으로는 내키지 않는 그 자와도 흔쾌하게 악수를 했다 이 손으로 만져서는 안 될 것들을 스스럼없이 만졌다 의수를 외투속에 꽂고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코리아나 호텔 앞 나는 공범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비누로 손을 씻는다 비누가 나를 씻는 것인지 내가 비누를 씻는 것인지 미끌미끌하다. ㅡ황지우

시와 수필 2024.11.03

겨울 ㅡ나무로부터 봄ㅡ나무에로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13도 영하 20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裸木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받은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 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 피는 나무이다 ㅡ황지우

시와 수필 2024.11.03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한 소회

예전 시를 지도해 주시던 시인은 쓰기를 두고 선택의 문제라고 했다. 고급독자로 남든지 작가로 남든지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접하고 채식주의자로 토론수업을 했던 지인들과 오랫만에 한나절을 보냈다. 맨부커상 수상 소식과 함께 그녀의 문장은 내게로 왔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불꽃)가 연작이고 세 곳의 계간지를 통해 발표된 것과 몽고반점은 이상문학상 수상작이라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대충 보고 안다고 할 수는 없다 안 본 것보다는 안다고 할 수야 있겠지만 다시 보고 또 볼 일이다 실컷 얘기하고 헤어졌는데 전화가 왔다 서점에 한강 책이 동이 났다고 책 좀 빌려달라고... 이렇게 큰 일을 당하면 실감이 날까 반가운 소식이다

책향기 2024.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