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김장을 백 포기쯤 하신다. 두 분이 잡숫는거야 얼마나 되랴 만은 두 동생네의 김장까지 하기 때문이다. 김치를 직접 담그는 나는 엄마의 수고가 어느 정도 인지 잘 안다.
동생 집에는 제때에 돌려보내지 못한 찬 통이 수북하다. 빈 통 반납에도 엄마의 독촉전화가 있어야 될 정도로 동생은 무심하다. 친정 갈 때 빈 통을 싣고 가는 동생과 바리바리 채워 보내는 엄마를 보면 나는 씁쓰레하다. 동생이 엄마에게 고마운 마음이야 있겠지만 미안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제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옳다는 게 내 생각이다. 어른이 된지도 벌써 5년이 년이 넘었으니, 하지만 동생은 무엇가를 해볼 엄두는커녕 알고 싶어 하지도 않을 뿐더러 필요성도 못 느끼는 듯하다.
어미 새만 쳐다보는 것 같은 동생이나 김치 손수 챙겨주지 않으면 밥 굶기라도 할 듯, 아니 엄마도리를 다 못하는 것처럼 여기며 사시사철 챙기는 엄마나 나는 양쪽 다 못마땅하다. 뭐든 잘 한다며 나를 위해서는 수고도 고민도 아예 하지 않는 엄마에게 내 안에선 가끔 나도 수긍하기 싫은, 감지하고 싶지 않은 묘한 기류가 흐른다.
동생이 우리 동네로 이사 온 첫 해, 언니네 김치가 최고라며 착착 감겨드는 동생이 이뻐서 퍼주다 보니 김장김치가 일찍 동이 났다. 이듬해는 배추와 양념을 넉넉히 준비했다. 당연 일거리도 많아졌다. 나는 이 참에 동생이 김치 담그는 법을 배워서 엄마의 김치에서 독립하기를 바랐다. 또한 어차피 나눠먹을 것 동생 손을 빌려 함께 담그면 무리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김장 준비가 다 되고 버무리는 날.
“ 김장하니까 좀 올래?“
“ 언니, 나 피곤해 그냥 잘 거야.”
야지랑스럽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기가 막혔다.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물건 팔러 온 외판사원도 아니고 이만 저만한 불청객정도 여야만 가능한 그녀의 맨트는 내 귀에 대못을 꽝 박은 듯 했다. 몇 번이나 가져다 먹던 김치 맛을 생각해서라도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것 같은 멍한 기분과 함께 김치를 담그는 내도록 울컥울컥 솟구치는 서운함을 삭히느라 애를 먹었다.
남의 중병이 내 고뿔만 못하다고 하더니, 제 상황 외에는 전혀 배려라고는 않는 그녀의 철없음이 목울대에 걸려서 넘어가지 않는 생선가시처럼 유감스러웠다. 동생은 애교도 많다. 언죽번죽 치렛말하는 넉살도 좋다. 하지만 나는 그 좋은 비윗살을 부리느니, 나 같으면 오늘 같은 날엔 열두 번도 더 달려올 일이다. 김치 먹을 자격도 없는 동생을 생각하면 한 포기도 주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잘 먹는 조카와 제부를 위해서 그야말로 몇 포기만 싸 주었다.
모르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든 건 그 해 김장을 한 한참 후였다. 김치엔 젬병인 동생이 김장에 드는 수고와 번거로움을 알 리가 없는 것이다. 그냥 쓱쓱 비빔밥 비비 듯 하면 되는 것 인줄 알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동서나 올캐가 동생처럼 그랬다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을 터인데 한 핏줄 동생이어서 인지 머리로는 이해를 했다. 하지만 가슴은 여전히 울컥거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처음에 김장 준비를 하면서 나는 행복했다. 식성 좋은 동생네 가족에게 년 중 최고인 김치 맛을 보여줄 수 있게 된 것과 동생과 함께할 김장으로 약간 들떠 있기도 했으며 모처럼 언니노릇 근사하게 해보고 싶어서 였다. 하지만 내 계획은 동생의 말 한마디로 깡그리 무너지면서 설레였던 마음은 일순간에 서운함과 허탈감으로 가득 했다. 놀부심통이 발동하고 어처구니없도록 옹졸해졌다. 나 혼자 질척거렸고 결국 애초에 주려했던 김치의 절반정도는커녕 3분의 1도 안되게 싸주면서 그것이 적어 보이지 않았다. 남김없이 싸 주고도 더 주고 싶어하는 엄마의 정에 비하면 내거 그만큼 주고도 심사는 심사대로 뒤틀린 것이다. 주고 싶은 마음이 순수했다면 일이 많았더라도 손을 빌지 않았더라도 이토록 심통이 끓어오를 리야 없지 않은가. 엄마는 동생이 한번도 도와주지 않지만 군소리 않으시고 집에까지 가져다 주신다. 그런 엄마의 무조건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시시콜콜 조건부인가. 돌이켜보면 동생이 내게 김치 달라고 부탁하지도 않는 것을 줄 것처럼 준비한 내게 과실이 있음을. 동생이 언니의 이런 편치 않았던 심사를 늦게라도 안다면 역시 엄마와 언니는 다르다고 할 것이다. 부끄럽긴 하지만 나는 언니인 걸 어쩌겠는가.
내가 이렇게 고약한 마음으로 번거로움을 겪게 된 것은 순전히 오지랖 넓은 내 성격 때문이다. 결국 내가 만든 일이니 내 몫이다. 동생의 염치없음에 분개한 것 또한 내 몫이다. 결국 그 해 김장을 통하여 내가 깨달은 것은 아무리 용을 써도 내 깜냥으로는 엄마 흉내 내기는 불가능 하다는 것이었다.
1촌의 거리는 얼마나 되는 것일까.
2005년 어느 이른 봄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