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오늘이 진짜 내 생일 맞나?"
생일날이면 적당히 취기가 오르고 기분이 좋아진 남편이 어김없이 묻는다. 그의 출생기는 위인의 탄생설화라도 되는 양 집안에서 모르는 이가 없건만 긴가 민가 하는 장난끼 표정도 해마다 똑같다. 어머님은 다른 자식들 생일은 모르셔도 큰아드님과 여덟 번째인 내 남편의 생일은 또렷이 기억하신다.
"그래 야야, 그 때 집으로 온 날이 열아흐레니까 널 낳은 건 열여드레 맞다."
어머님에게선 뜸 드는 밥의 향기가 난다. 토 하나 억양 하나도 틀리지 않고 매번 그 시절 그 상황으로 돌아가신다. 그런 어머님이나 뻔히 알면서도 묻는 남편이나 참 어지간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바투 앉은 모자의 모습이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다. 복덩이라는 어머님의 믿음에 잔뜩 기대를 부풀리는 남편의 동안(童顔)에서 문득 나는 강보에 싼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어머님을 떠올리는 것이다.
"근께, 그 날이 영주 장날이라서 의성 장날에 마늘을 많이 받아 놨지."
어머님은 마늘 300접을 받아다가 영주 장날에 맞춰 소화물로 부쳐 놓았다. 장날 이른 새벽에 이슬이 비쳤다. 여덟 번째나 되니 그것이 해산기미란 걸 모를 리 없었다. 그렇다고 이미 영주에 가 있는 마늘을 묵힐 손가. 다음 장 마늘 금이 어찌 될지 모르는데. 해산도 마늘도 놓칠 수 없었다. 혹 가다가 차안에서 해산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어서 작은 가위와 흰 무명실 한 타래를 보따리에 넣고 영주행 기차에 올랐다.
마늘이 불티나게 팔렸다. 산더미 같던 마늘이 돈이 되어 전대로 들어갔다. 진통이 장꾼처럼 왔다 갔다 했다. 허리에 찬 전대에 돈이 넘쳐서 옆구리로, 뒤 허리께로 꾹꾹 다지고 밀어 넣었다. 파장 무렵이 되자 진통이 더 빨라졌다.
여인숙엔 방이 없었다. 진통이 막바지에 닿았다. 여인숙 아주머니가 허둥지둥 장사꾼들에게 양해를 구해서 내어 준 방, 그 곳에서 여덟 번째 순산을 했다. 아들이라니 기분이 좋았다. 숨구멍 터진 아기 울음이 왜 그리 가슴을 복바치게 하던지 어머님은 실컷, 실컷 울었다.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야 한다는 일념에 묻혀있던 삶의 고달픔이 눈물에 씻겨내렸는지 속이 후련했다. 여인숙 아주머니는 가마솥에다 넉넉히 물을 데워 아기를 목욕시켰다. 햅쌀까지 팔아와서 새 밥을 짓고 진하게 미역국을 끓여 주었다. 그렇게 맛있는 미역국은 생전 처음이었다.
그 아들이 복덩이일 수밖에 없다는 어머님의 믿음에는 확실한 이유가 있다. 뱃속에서부터 수북한 전대로 감싸여 있었으니 평생 돈 걱정 따위 있을 턱이 없다는 것이다. 쥐띠에 음력 구월이니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과 곳간에는 먹을 것이 지천인데다 저녁 아홉 시 무렵은 바야흐로 쥐가 판치는 때 아닌가. ‘사주 또한 오죽 좋으랴’고 하신다.
그럼에도 지금도 속상해 하시는 대목이 있다. 해산 다음 날 자전거를 가지고 역으로 마중을 나오신 아버님을 만난 것 까지는 좋았는데 우연히 마주친 사촌 시숙이 택시를 잡아 주며 억지를 부리는 바람에 별스럽게 사치를 한 일이다. 자전거까지 맡기면서 덩달아 그러자고 하신 아버님이 밉기까지 하셨단다. 쌀 다섯 되는 살 수 있는 돈을 길에 깔아버린 일이 지금 생각해도 못내 아까운 것이다. 어머님께는 해산도 일상이었을까.
어머님은 팔순을 넘기셨음에도 몸져눕기 전에는 땅을 놀리는 일이 없을 듯 하다. 논밭으로 오가는 시간을 벌기 위해 도시락까지 준비해서 들로 나가시는 어머님은 농번기에는 아플 여가도 없다. 비가 와야만 우리 집에 오실 짬도 내신다. 밤새 '아이고 아이고' 쑤시고 결리는 통증으로 뒤척이다가도 동이 트기도 전에 잠자리에 있는 아들을 재촉하신다. '출근길에 나 좀 터미널꺼정 데려다 주라이' 순전히 그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다.
고생도 낙이 될 수 있을까. 인고의 세월에 인이 박혔을까. 쓴 것만 먹고 쓴맛만 알아 써도 쓴 줄 모르는지 시골집에 도착하면 거짓말처럼 안 아프다고 하신다. 집 떠나면 아픈 병인지 일을 해야 낫는 병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런 어머님의 고집은 어느새 자식들에게도 익숙해져 있다. 그 고집이 안락함이나 풍요로움을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데서 오는 억척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화들짝 깨어난다. 어머님의 사랑을 모욕한 듯하여 목이 메게 죄스럽다.
펄펄 내리는 눈을 보면서도 어머님은 농사를 꿈꾸신다. 가을추석에 자식들에게 참깨 한 되, 참기름 한 병을 싸주기 위해 어머님은 날마다 날마다 또 다른 해산의 고통을 겪고 계시는 것이다.
2004년 구미수필 2집 수록
월간 수필문학 2004년 5월호 천료등단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