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큰 것이 동생들은 내 팽개치고 제 멋대로 싸돌아 다닌다" 며 엄마는 매번 그악스럽게도 나를 힐책했다. 놀러 가는 것도 엄마에게 하락을 받아야 했다. 가고 싶다고 덜렁 갔다가는 벼락을 맞기 일쑤였다.
어느 여름이었다. 또래들이 뒷산 소나무 숲에 국수버섯(내 고향에서는 싸리 버섯을 이렇게 불렀다)을 따러 가자고 했다. 또래들이야 그전에도 몇 번이나 갔었지만 나는 한 번도 가 본적이 없었다. 우리 동네에서 보면 그 뒷산은 소나무 숲이 울창했는데 족히 5리가 넘었다. 허락받으러 간 내게, 밭에서 일하던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 동생을 등에 업혀 주시며 박절하게 오금을 박았다.
'이 더위에 어딜 가느냐고 버섯같은 거 안 따도 되니까 집에나 가 있으라고'
친구들은 소쿠리 하나씩을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등에 업힌 동생의 무게는 깃털처럼 가벼워 졌고 그 마술같이 변화 무쌍한 동생의 무게덕분인지 친구들을 따라 나서기에 주저 할 것이 없었다. 소쿠리 하나 달랑 든 친구들의 재우친 발걸음을 따라 등에 혹 하나를 달고 겅중겅중 뒤따라 가면서도 나는 행복했다. 친구들과 함께 간다는 것 만으로도.
소나무 숲속에는 누런 솔 갈비들 사이로 국수모양의 하얀 버섯들이 군대 군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모양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걸 담박에 알 수 있었다. 스폰지를 잘라 놓은 듯 손끝에 살짝만 힘을 줘도 부서질 만큼 조직이 연했다. 소나무 밑에 들어가 이것을 따노라면 등에 배인 흥건한 땀으로 고개를 숙일 때마다 동생이 거꾸로 기울었고 일어서면 아래고 미끄러졌다. 헐거워진 포대기로 엉덩이까지 미끄러지는데도 그것도 업힌 것이라도 동생은 칭얼대지도 않았다. 나 역시 연신 동생을 치받치면서도 버섯 따는 재미로 힘든 줄도 몰랐다.
또래 중에 맏이는 나 혼자 뿐이었다. 친구들은 들로 산으로 고삐 풀린 말처럼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다 쏘다녔다. 내가 열 살 무렵될 때부터 엄마는 밭에 나가실 때면 동생 셋을 모두 내게 맡겼다. 중간에 두 동생은 알아서 잘 놀았다. 하지만 8살이나 아래인 막내는 업어 주어야 칭얼대지 않았다. 내 등에서 살다시피 했다. 빨리 돌아 오겠다던 엄마는 일러야 해질 무렵이었고 어둠이 내려 앉아 앞산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 되어야 돌아오셨다. 엄마만 애오라지 기다리던 나는 말뚝에 고삐매인 소, 송아지까지 돌봐야 하는 순한 어미소였다.
멀리서 산이 기지개를 켜면 봄의 전령인 듯 참꽃이 수런수런 분홍빛으로 제일 먼저 일어났다. 산 색이 변하면 그 산을 보는 마음에도 물이 들었다. 참꽃은 들일 끝내고 돌아오시는 아버지의 바지게를 타고 내게로 왔다. 하지만 나는 산으로 가고 싶었다. 참꽃이 무더기로 핀 곳을 찾아 맘껏 뛰어 가고 싶었고 친구들처럼 아름아름 꺾어서 장독대 빈 항아리에 꽂아도 두고 싶었다. 참꽃 맛은 시큼하니 쌉싸름 했고 순한 향기가 있었다. 그런 맛이 요즘 맛에 비하면 무에 그리 좋다고 입술이 시퍼렇게 되도록 따 먹었다.
찔래 순은 언덕 배기만 가도 지천이었다. 통통하게 쭉쭉 뻗어 올라오는 새순은 초록빛 껍질을 고구마 줄기 벗기듯 벗기고 나면 투명한 속살이 아삭아삭하니 풋풋했다. 연초록이 아니면 절대로 낼 수 없는 싱그러움 이었다. 찔레순도 한철이고 진달래도 한철이라 친구들은 맘껏 쫒아 다녔지만 나는 산 바라기만 해야 했다.
내겐 놀이도 한정되어 있었다. 숨바꼭질이나 자치기 같이 뛰어다니는 놀이보다 공기놀이나 땅따먹기가 제격이었다. 우리 집 감나무 밑에는 공기 돌을 모아 흙으로 덮어둔 공기 돌 무덤이 있었다. 친구들은 공기놀이나 공기 돌에 나처럼 애착도 없었지만 나는 틈날 때 마다 공기 돌을 신작로에서 주워 치마폭에다 싸다 날랐다. 엄마는 치마자락에서 후두둑 쏟아 내는 그 돌들을 보면서 치마 떨군다고 야단을 쳤다. 하지만 그 시절에 치마만큼 공기 돌을 나르기에 알맞은 건 없었고 치마의 용도는 의외로 다양했다. 잘 닳은 돌은 팥죽의 옹심이처럼 고만 고만 했다. 내가 공기 돌을 애지 중지 한 것은 순전히 친구들을 유인하기 위해서였다. 놀러 가자고 온 친구들을 설득하여 우리 집에 눌러 앉히기에는 공기만한 물건이 없었다. 그것들을 감나무 아래에 아금받게 챙겨 두면 곳간에 쌓아 둔 곡식인양 터질듯한 포만감으로 감나무만 봐도 흐뭇했다.
땅따먹기는 땅바닥에 커다란 원을 그려서 한 뼘 크게 반원을 그리고 각자 제 집을 정했다. 사금파리 같은 것으로 말을 만들어 제 집에서 출발, 세 번 튕겨서 다시 제 집으로 되돌아 오면 말이 지나간 선을 직선으로 연결하여 그 안쪽 땅이 내 땅이 되는 거였다. 손가락에 미치는 힘의 강도가 말의 크기와 무게에 부합하여 목표지점에 정확하게 보내져야 하는 고난도의 손가락 테크닉이 필요한 놀이였다. 땅따먹기처럼 땅에 대한 애착을 강하게 갖게 했던 놀이도 흔 치 않았다. 등에 업힌 동생을 내려 놓고 둘 이상이면 놀 수있는 이 놀이들은 내겐 안성맞춤이었고 거의 천부적인 소질까지 있었던 듯 하다.
그렇게 막내를 데리고 집에서만 놀았던 내가 설마 버섯을 따러 갔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엄마는 해설피쯤 버섯소쿠리를 들고 들어서는 나를 보고는
"어이구! 야가, 얼마나 가고 싶었으면 어른도 가기 힘든 곳을 ....."
하시며 아무 말씀도 못하셨다. 눈물을 머금은 것 같은 엄마의 눈을 보면서 내 눈에선 닭똥같은 눈물이 통곡처럼 쏟아졌다. 엄마가 내 마음을 알아 주는 것 같은 모습을 보며 그제 서야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깨달으면서 갑자기 스스로 측은하고 불쌍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 후로도 엄마는 그 때 네 모습이 그토록 애시럽고 마음에 걸렸던지 '어린 것이 얼마나 가고 싶었으면 어른도 가기 힘든 곳을 동생까지 업고 갔다 왔더라고......' 그럴 때마다 이상하게도 매번 그 저녁의 감정이 울컥 되살아 난다. 가슴속에 한 번 아름답고 슬픈 눈물로 남은 추억은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것인지. 자유롭지 못했던 몸 고생 마음고생이 금방 되살아 난다.
맏이로 산다는 것, 그것은 먼저 난 사람으로서의 의무감 같은 것을 등에 업고 사는 것인 것 같다. 동생들은 절대로 경험해보지 못하는 특권같은 아픔을 어릴 적부터 안으로 안으로 삭히며 사는 일인 것 같다
2004년 구미수필 2집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