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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 기장의 문학터치 (138)

구름뜰 2008. 5. 8. 09:51
손민호 기자의 문학터치 <138> 내 마음속의 박경리를 추억하며
[중앙일보] 2008년 05월 08일(목) 오전 00:57   가| 이메일| 프린트

[중앙일보 손민호] 5일 박경리(사진)가 돌아가고 나서 매일 저녁 빈소로 출근했다. 문학기자라면 응당 치러야 하는 업(業)이다. 그렇다고 딱히 하는 일은 없다. 분향하고 술 마시고, 반가운 얼굴과 시시덕대고, 또 술을 마신다. 그렇게 밤이 깊어지다 보면, 불현듯 지금 여기가 박경리의 빈소란 사실이 새벽 안개처럼 엄습한다. 모두의 표정이 굳고, 일순 침묵이 내려앉는다. 찰나의 정적 속에서 진즉에 불콰해진 낯과 낯은 각자의 가슴에 새겨진 박경리를 추억한다. 문학터치도, 몇 안 되는 ‘나만의 박경리’를 되새김질한다.

경남 통영 말에 ‘암떼다’란 게 있다. 통영에서 태어나 반세기 가까이 고향 땅 한 번 안 밟았다가 내일 거기에, 그러니까 통영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미륵산 기슭에 묻히는 할머니로부터 배운 말이다. 풀이하자면, 더분더분 말하는 성질이 못 되고 항상 남의 뒷전에 서 있는 성격을 이른다. 그랬다. 박경리가 딱 그랬다.

문학터치는 인터뷰 의사를 넣은 지 이태 만에 선생을 뵐 수 있었다. 지난해 6월이었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그땐 은근히 서운했다. 아무리 인터뷰를 꺼린다지만 섭섭한 건 섭섭한 거였다. 그러다 이번에 알았다. 김병익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도 35년 전 문학터치와 똑같은 처분을 받았다는 걸. 1973년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김병익은 서울 정릉 작가의 자택 앞에서 두 번이나 문전박대당했다.

선생을 찾아뵙기 전, 선생의 지인으로부터 몇 가지 주의사항을 전해들었다. 그 첫째가 사위 얘기는 되도록 꺼내지 말라는 것이었다. 선생의 사위라면 시인 김지하다. 시대의 영웅을 사위로 뒀다면 자랑스레 여겨야 마땅할 터. 그러다 이런 자료를 찾아냈다.

‘1975년 2월 15일 오후 9시쯤 서울 영등포교도소 앞. 내란선동죄 등으로 사형이 선고됐던 김지하가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김지하를 기다리는 수많은 환영 인파 속에 장모도 있었다. 갓 십 개월 된, 여태 아비의 얼굴 본 적이 없는 손자 원보를 업은 채였다. 그러나 김지하는 장모를 못 보고 지나쳤다. 김지하는 목말을 타고 ‘우린 승리하리라’를 목청껏 부르다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이듬해 김지하는 다시 구속됐고, 박경리는 외손자가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손수 키웠다.’

다른 자료를 뒤졌다. 박경리는 사위를 ‘김서방’이라 부르지 않았다. ‘지하’라고 이름을 부르거나 잘해야 ‘원보 아비’ 정도였다. 박경리의 남편은 한국전쟁이 터지던 해 행방불명됐다. 이른바 좌익이었다. 박경리는 좌익 남편을 둔 여자의 한을 외동딸에게도 대물리고 싶지 않았던 거다.

빈소에서 김지하를 만났다. 김지하만의 박경리가 궁금했다. 그러나 그는 말을 삼갔다. 아니 아예 얼굴을 돌렸다. 김대중 전 대통령 앞에서 “장모님은 ‘너보다 원보가 훨씬 낫다’고 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했습니다”라고 잠깐 말했을 뿐이다.

빈소에서 가장 서럽게 울고 간 작가는 공지영이었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그는 ‘범띠 여자의 사나운 팔자’ 얘기를 꺼낸 적이 있다. 박경리와 공지영은 둘 다 범띠생이다. 토지문화관에서 묵었던 백가흠은 선생이 손수 무쳤던 장아찌 반찬을 기억했고, 윤성희는 토지문화관 앞뜰 뽕나무 아래서 오디 줍던 일을 떠올렸다. 다들 마찬가지였을 거다. 유난히 얼굴 많이 비쳤던 정치인도 그랬을 거다. 제 마음속 박경리에게 끌려 영정 앞에서 고개 숙였을 거다.

술잔이 또 비었다. 그러나 나만의 박경리는 더 이상 채울 수 없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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