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기사

신문기자 기형도

구름뜰 2008. 5. 8. 09:55
신문기자 기형도 조회(425) / 추천(2) / 퍼가기
등록일 : 2006-06-18 17:42:28

16일 경기도 광명에서 열린 기형도 시인 시비 제막식에 다녀왔습니다.
조촐하고 소박했지만 의미있는 행사였습니다.
문화면에 기형도 기사를 크게 준비했다가
월드컵 때문에 문화면이 없어졌다는 걸 일요일(18일) 오후에나 알게 됐습니다.
이 김에 기형도를 다시 보자며, 여러 자료를 촘촘히 준비해왔던 터라 여간 아쉬운 게 아니었습니다.
기사는 그래서 다소 밋밋하게 사회면에 실리게 됐습니다.



   
-시비 제막식과 함께 열린 기형도 시인 전시회 장면입니다. 사진 오른쪽 등산복 입은 사람  이 소설가 성석제씨입니다. 늘 등산복 차림이지요. 성석제씨는 기형도 시인과 연세문학회 친구였습니다. 사진 왼쪽, 뒷짐 진 신사분은 이날 열린 세미나에서 발표를 맡았던 평론가 김춘식(동국대 국문과 교수) 선생이지요.



여러 자료와 숱한 일화를 죄다 소개할 순 없고,
개인적으로 무척 흥미로웠던 것 몇 가지만 여기에 늘어놓지요.
기형도 시인이 중앙일보 기자였던 건 알고 계시죠?
84년 10월 입사해, 정치부, 문화부, 편집부 등을 거쳤지요.
89년 3월 서울 허리우드 극장에서 변사체로 발견됐을 때,
기형도 선배는 편집부 소속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사검색을 해봤더니, 죽기 직전 6개월 가량은 검색이 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문화부 시절, 특히 방송담당이었을 때 재미난 기사 몇몇이 있었습니다.


샛별이 떴다.
KBS 제2TV가 지난 2일부터 방영을 시작한 새 일일극『사모곡』(임충극본·이윤선연출)의 여주인공 김혜수양은 이제 겨우 17세·올해 배화여고 2년생이 되는 해맑은 소녀다. 방송가에서는 김양이 지난해 19세의 나이로 KBS제1TV일일극『여심』의 여주인공을 맡아 일약 스타덤에 오른 김희애양 못지 않은 신데렐라라며 놀라와하고 있다.
......

그러나 김혜수는 아직까지 커다란 곰인형을 안고 잠드는 깜찍하고 예쁜 여학생일 뿐이다. 166㎝의큰키 .


87년 2월 5일자 기사입니다.
당시의 샛별 김혜수씨 기사입니다.
김혜수씨는 알까요?
당시에 자신을 인터뷰했던 중앙일보 기자가 
20년 가까이 지난 오늘 최고의 시인 중 하나란 사실을.

가장 눈길이 머문 기사는 86년 11월 19일자 중앙일보 12면에 실린 기사입니다.

MBC-TV의 간판급 드라머 『전원일기』 (김정수 극본·이관희 연출)의 18일밤 방영분 「배추」편이 돌연 펑크, 시청자들의 항의를 받고 있다. 이는 MBC가 이날밤 신문의 TV안내까지 의뢰했던 「배추」를 방영 직전 돌연 취소하고25일 내보내려던 「올챙이 키우기」를 부랴부랴 교체 방영, 「배추」를 보기 위해 TV를 켰던 시청자들을 실망시켰기 때문.
이유는 「배추」편이 최근의 농촌현실과 흡사한 배추값 폭락을 소재로 다루고 있어 농정당국의 비위를 거스를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전원일기』는 농촌사람들의 인정과 애환을 잔잔히 묘사, 6년째 시청률 1위를 고수하고 있는 인기 프로그램. 『전원일기』가 폭넓은 시청층을 확보, 꾸준한 인기를 누려왔던 것은 극심한 소재 제한속에서도 나름대로 농촌의 실상을 거짓없이 그려내려 노력해왔기 때문이었다. 이날 방영키로 했던 「배추」 역시 최근 배추값 폭락에 절망한 농부를 다루되 좌절을 딛고 일어서려는 그네들의 안쓰러운 의지를 서정적으로 영상화한 작품이었다.
따라서 생경한 고발극도 아닌 예술성 짙은 풍자극을 취소한 MBC측의 결정은 드라머의 신뢰도와 환경감시 기능을 스스로 훼손한 처사라는 것이 시청자들의 일반적 의견이다.
『전원일기』는 지난 83년 8월에도 양파값 폭락을 다룬 「괜찮아요」편을 방영했다가 2주일간 방영금지를 당하고 후속편도 극본이 모조리 뜯어 고쳐지는 조치를 겪은바 있다.
이번 사태에 대해 이 작품을 쓴 여류작가 김정수씨는 『서글프다. 추운날 촬영하느라 고생한 연기자들에게 미안하다』며 울먹였다.
말썽이난 「배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배추값이 폭락하고 팔데도 마땅치 않자 1년 내내 배추밭에 매달려온 일용(박은수분)은 온몸에 힘이 빠진다. 집에 돌아와보니 처는 궁상맞게도 서울 친척들에게 배추 좀 사달라고 편지를 써놓았다. 일용은 하는수 없이 배추 1백30포기를 한접씩 쳐서(한접은 원래 1백포기) 헐값에 팔아치운다.
일용 어머니 (김수미분)는 본전도 못 건진 배추값을 벌어야겠다며 인근 도회지로 소쿠리장사를 나간다. 일용어머니는 장사한 돈으로 일용에게 『네가 제일 춥겠다』며 털스웨터를사다준다. 속이 상한 일용은 이웃집에서 마을 청년들과 술을 마시다.
대취한 일용은 『양파를 심으면 양파값이, 배추를 심으면 배추값이 폭락하니 나는 땅과 인연이 없다. 땅을 버리겠다』며 울면서 춤을 춘다. 다음날 아침 술이 깬 일용의 뺨에 누군가 뽀뽀를 한다. 아빠를 찾으러온 딸 복길이다. 일용은 복길을 안고 집으로 향한다. 그래도 여기는 우리의 땅이다. 자식들은 흙의 희망이다. 우리는 고향을 떠날수 없다. <기형도기자>

'전원일기'의 '배추'편이 불방된 사건을 기사는 보도하고 있습니다.
기사 내용도 흥미롭지만, 제가 주목한 건 기사의 문체입니다.
20년 전 기사인데도, 요즘 기사처럼 생생합니다.

소위 기사체란 게 있습니다.
6하 원칙을 철칙처럼 지켜야 합니다(기자 출신 작가 김훈이 끔찍히 싫어했던 그 원칙입니다).
기사는 사실만 보도할 것이며, 주장과 주의는 칼럼 등에서 따로 다뤄야 합니다.
사실 이래야 객관성과 공정성을 담보한 기사란 소릴 듣습니다.
요즘엔 기사체가 많이 부드러워지고 형식도 다양해졌지만(그렇다고 믿고 있지만)
20년 전만 해도 훨씬 엄격하게 적용된 원칙입니다.

그런데 기사를 보십시오.
특히 맨 마지막 문장..
그래도 여기는 우리의 땅이다. 자식들은 흙의 희망이다. 우리는 고향을 떠날 수 없다.

한 편의 시 아닌가요?
드라마 한 편 불방됐다고 이렇게 써도 되는 건가요?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둘째 문장입니다.

자식들은 흙의 희망이다, 라고 기사로 쓸 수 있다니....
흙이 우리의 희망이 아니라. 그래서 우리는 고향을 떠날 수 없는 게 아니라,
자식들이 흙이 희망이라니....

기사를 쓴 기자도 놀랍고, 당시 기사를 데스킹한 문화부장도 존경스럽습니다.

천생 시인이었습니다.
기사도 시처럼 쓴 시인이었습니다.


기사를 보고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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