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말 고사다, 논문심사다, 회의다, 그야말로 꽁지 빠진 닭처럼 정신없이 내닫다 보니
벌써 오늘이 이번 주 신문 칼럼 원고 마감일이다. 사실 바쁘다는 것은 핑계이고,
무슨 일이든 미리 해 두는 습성이 없어 마감일이 닥칠 때마다 나는 나대로 초조하고,
내 원고를 기다리는 기자님은 기자님대로 괴롭다.
오늘은 무엇에 대해 쓸까. 이 칼럼을 시작할 때
'재미있고 의미 있고, 독자들이 보고 당장이라도 책방으로 뛰어갈 수 있는 글을
써 달라는 것이 바로 신문사측의 부탁이었다.
그러나 오늘같이 날씨는 무덥고 불쾌지수는 높고 세상은 시끄럽고,
이 와중에 신선한 충격을 받고 금방이라도 책방으로 뛰어가게 할 수 있는 글을 쓸 재간이 내겐 없다.
20세기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무언가 뭉클하고 목구멍에 뜨거운 것이 치밀 때" 면 시를 쓴다고 했다.
19세기 여류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머리 전체가 폭발해 나간 것 같은 느낌일 때" 글을 쓴다고 했다.
위선의 껍데기를 벗고 순수한 마음이 될 때 글이 더 잘 써진다는 말일 것이다.
언감생심, 나를 이런 위대한 시인들에 비교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도 가끔 마음이 깨끗하고 어떤 감동을 느낄 때 글이 잘 나오는 듯하다.
그러나 이 험한 세상을 무관심과 무감동으로 무장하고 살아가면서
그저 마감 시간에 쫒겨 별 감흥도 없이 쓰는 글이니 마음대로 제때에 나와 줄 리가 없다.
알프레도 케이진이라는 문학비평가는
"누구든 글을 쓰는 이유는 스스로를 가르치고 이해하기 위해서,
그래서 결국 자기만족을 위해서 글을 쓴다."고 했다.
그러나 이렇게 마감 시간의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나 자신을 가르치고 이해하고 만족하기에는 나는 너무 게으르다.
헨리 밀러는
"세상에 나가서 자신의 신념을 실제로 행동으로 옮길 용기가 없는 사람이 글을 쓴다"고 했지만.
나는 내 신념을 글로 쓰느니 차라리 세상에 나가서 실제로 행동으로 옮길 용기를 부려 보겠다.
무엇에 대해 쓸까 걱정하면서 냉장고에서 계속 먹을 것을 꺼내는 나를 보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좀 미리 써두지 그러니? 그렇게 박두해서 쓰면 생각인들 나겠니?"
"엄마도. 글은 아무 때나 써요? 영감이 떠올라야죠. 영감이."
'영감 Inspiration'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19세기 영국 낭만주의 시인 셀리는
"시란 이성으로 생각하는 것과 달라서. 의지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
즉 '나는 지금부터 시를 쓰겠다'는 의지만으로 시가 써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물론 셀리가 무덤에서 꿈틀거릴 일이지만,
나도 " '문학의 숲' 칼럼을 써야겠다"는 의지만으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어젯밤도 오늘 아침도 '영감'이 내게 찾아와 주기만을 고대하며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전 이미 마감이 지난 학기말 페이퍼를 내지 않은 학생이 전화를 했다.
왜 빨리 페이퍼를 내지 않느냐고 다그치는 내게 인호가 대답했다.
"선생님. 글이 안 나와요. 멋진 페이퍼를 써 보려는데 아직도 영감이 안 떠올라요."
"영감? 영감 좋아한다. 가만히 앉아서 영감을 기다리면 아무것도 못 써.
당장 책상 앞에 앉아서 쓰기 시작해!"
말을 하고 나니 결국은 나 스스로에게 한 말이다. 사실 나는 한번도 무슨 대단한 영감이 떠올라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픈 용망에 불타서 글을 쓴 적이 없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내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신이 내 어깨를 움직여 글을 쓴다"고 했지만,
나는 셀리나 소로 같은 천재가 못되니 영감만을 기다리고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어떤 종류이든 인호나 나처럼 지금 글을
써야 하는 독자들이 있다면 미국의 수필가 J.B. 르피스틀리의 지혜를 나누고 싶다.
"애당초 글을 쓰지 않고 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꼭 써야 한다면 무조건 써라.
재미없고, 골치 아프고, 아무도 읽어 주지 않아도 그래도 써라. 전혀 희망은 보이지 않고,
남들은 다 온다는 그 '영감'이라는 것이 오지 않아도 그래도 써라.
기분이 좋든 나쁘든 책상에 가서 그 얼음같이 냉혹한 백지의 도전을 받아들여라."
장영희 <문학의 숲을 거닐다 - 백지의 도전 - 부분>
글쓰기의 어려움을 너무도 잘 토로한 문장이라서 여기다 옮겨본다.
'영감'(일명 나는 '그분'이라고 한다)이라는 것이 내게도 몇번 온 적이 있었다.
그림을 그릴 때도 그런적이 있고
글을 쓸때도 아주 간혹 그분(영감)이 오셨음을 경험한 적이 있다.
내가 경험한 그분은 사실 왔을때는 온줄 몰랐다가
지나고 나서 보면 '아 그때 그분이 왔을 때 였구나' 하는 정도로 느꼈던 부분이다.
장선생 말씀처럼 그분이 아니라 '마음이 깨끗하고 어떤 감동을 느낄때' 그 순간일지도 모른다.
우둔해서 나만 뒤늦게 느끼는 건지는 모르지만 내게 영감은 그랬다.ㅎㅎ
-문학의 숲을 거닐다-에 서술되고 인용된 다양한 문학 작품들은
장영희 선생님의 이런 글쓰기 고민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글을 쓸려고 시도를 해 본 사람이면 충분히 공감가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는 사람들, 그들은 그 고민을 즐기는 부류다.
나는 언제쯤 즐길 수 있을지..
이책은 장영희 선생님이 접한 문학작품들이
선생의 마음에 어떻게 와 닿았는지, 어떤 감동을 주었는지,
그래서 그 작품들로 인해 자신의 삶이 얼마나 풍요롭게 되었는지를 솔직하게 서술해 놓았다.
이 책의 독자가 누릴수 있는 기쁨은
문학작품(고전)과 더불어 수필가이기도한 인간 장영희의
진솔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아름다운 것을 보면 눈물이 나는 그런것을 이 책에서도 몇번 경험했다.
그런 잔잔한 감동 때문에 다 읽고나서도 다시 손이가는
내리 두번을 읽고도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책을 펼쳐 중요한 부분을 몇 번 더 읽어 봐도 좋다.
그래서 읽고 책꽂이에 꽂아두기엔 아까운 책이다. 수필형식이라 더 그런것 같다.
가까이에 두고 수시로 짬날 때 마다 펼쳐보고 흡수하고 난 뒤라야 책꽂이로 갈 것 같다.
인간이 아름다운 이유는 아파도, 슬퍼도, 상처 받아도
서로 위로할줄 알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을 추구할 줄 알기 때문이다.
진흙속에서 살더라도 그에 때묻지 않는 연꽃처럼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삶을 개척할 수 있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그리고 문학은 우리에게 그것을 알려준다.
상상력과 창의력 논리적 분석력도 결국은 인간됨을 제대로 이해하고
가장 인간적인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올바른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장선생은 이 책을 '손 내밈'이라고 했다.
문학의 숲을 함께 거닐며 향기로운 열매를 향유하고
이 세상이 더 아름다워 질 수 있다는 믿음을 나누고 싶은 초대라고...
장선생은 지난 5월에 가셨지만 그분의 '손내밈'은
이렇게 남아 있으니 독자들은 복이다.
이 책을 통해 문학의 숲을 그녀가 내민 손을 잡고 맘껏 산책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릴케가 1903년부터 1908년까지
어느 시인 지망생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내가 가장 인상깊게 읽은 부분은 그의 사랑에 관한 정의이다.
"우리는 어려운 것에 집착하여야 합니다. 자연의 모든 것들은 어려운 것을 극복해야
자신의 고유함을 지닐 수 있습니다. 고독한 것은 어렵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어렵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아마도 내가 알기에 그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고 다른 모든 행위는 그 준비 과정에 불과합니다.
젊은이들은 모든 일에 초보자이기 때문에 아직 제대로 사랑할 줄을 모릅니다.
그러나 배워야 합니다. 모든 존재를 바쳐 외롭고 수줍고 두근대는 가슴으로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사랑은 초기 단계에서는 다른 사람과의 합일, 조화가 아닙니다.
사랑은 우선 홀로 성숙하고 나서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하나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릴케에 의하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자격이 필요해서,
먼저 나 스스로의 성숙한 세계를 이루어야 한다.
언제부턴인가 삶의 안일주의에 빠져 어려운 것을 피하고 나의 '고유함'을 잃은 지 오래고,
남을 위해 하나의 '세계'가 되기는 커녕 여전히 옹졸한 마음으로
길을 잃고 헤매며 살아가는 나는 어쩌면 사랑할 자격조차 갖추지 못했는지 모른다.
중년의 어느 봄날,
배고파 기절하면서도 시를 읽는 어리석음이 문득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웬일일까.
'릴케'라는 이름이 열정과 낭만을 잃고
한줌의 재가 되어 버린 나의 메마른 가슴에 작은 불시를 지펴 놓은 모양이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 - 어느 봄날의 단상 -부분>
라이너 마리아 릴케..
고등학교 때 국어선생님께서 장미가시에 찔려 죽은 시인이라고 했던,
장미 가시에 찔려 죽을 수도 있음을 처음으로 알게했던,
죽음까지도 가장 시인답게 맞이한 것 같은, 이름은 또 얼마나 낭만적인지.
릴케는 시인의 고유명사처럼 그렇게 익숙한 이름이다.
사랑이 어떻게 네게로 왔는가?
햇빛처럼 꽃잎처럼
또는 기도처럼 왔는가
행복이 반짝이며 하늘에서 몰려와
날개를 거두고
꽃피는 나의 가슴에 걸려온 것을..
하이얀 국화가 피어 있던날
어쩐지 마음에 불안 하였다.
그날밤 늦게 조용히 네가
내 마음에 다가왔다.
릴케하면 떠오르는 시다.
이렇게 오래된 시가 생각나면 나는 또 금새 그 시절 그러니까
그 시를 처음 접하고 좋아했던 추억(여고시절)속으로 빠져든다.
시를 제일 많이 읽고 접했던, 감성도 풍부하고 모든것이 아름답기만 했던 시절.
지금처럼 책을 많이 사 볼 수는 없었기에 교과서에 나오는 명시들은 모조리 다 외웠었다.
물론 뜻도 모르고 외운시가 더 많기도 했다.
국어시간과 국어선생님이 유독 좋았던 시절,
고등학고 1학년때 국어 선생님은 임신한 몸으로 만삭이 될 때까지 우리를 가르쳤는데
늘 詩부분을 가르칠때의 선생님은 모습은 임산부였지만
말씀과 눈빛은 언제나 꿈꾸는 소녀의 모습처럼 아름다웠다.
그렇게 시를 읽으며 시인이 되어 시인의 감성으로 각각의 시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詩는 그렇게 내게도 시인과 국어선생님의 감성까지 함께 감정이입이 되어 그대로 흡수하는 시기였다. 그래서 감성도 함께 키웠던 시절, 수업종이 울리면 선생님은
"다음 시간까지 다 외워오기다. 숙제다".
덕분에 많은 長문의 詩들 까지도 줄줄이 외울수 있었던
그나마 기억력까지도 따라주던 보석같은 시간들!
국어 선생님 덕분에 더욱 아름다운 때를 보냈던 다시 돌아갈 수 없어서
더 아름다운 추억속의 시간들...
5교시에 국어수업이 있는 날이면 점심을 빨리먹고 친구랑 학교 뒷동산으로 올라갔다.
뒷동산이라야 5분도 안되는 거리고 교정에 속하는 산이라 우리들만의 공간이었다.
나무그늘 벤취에 누워 하늘을 보면서 시를 외우고 외운 시를 눈 감고 읊조리기도 했던..그 시간들..
눈감아도 파란 하늘이 느껴지는 그런 눈부신 시간들. 그때 보았던 파란 하늘과
신록의 아름다움,, 그리고순풍에 실려오는 아카시아 향기, 가을단풍까지
자연속에서 눈감고 시를 외우는 내 모습에 취해 내가 시인이 된 듯,
그 시를 내가 짓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시에 감동하고 감탄하면서
막연하게 나는 지금 이때가 참 좋은 때라는 생각을 그 시절속에서도 인식하고 있었다.
미지의 세계 오지 않은 세계를 동경하는 것보다
그 순간을 참 행복하다고 느꼈던 시절을 보낸셈이다.
각설하고.
릴케는 사랑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좋은것이며
젊은이들은 제대로 사랑할 줄을 몰라서 배워야 한다는 것
모든 존재를 바쳐 외롭고 수줍고 두근대는 가슴으로 배워야 한다는 것
그리고 홀로 성숙해야 한다고 했다.
사랑은 어느날 예고도 없이 가슴으로 온다.
그리고 그 사랑이 어렵다는 걸 사랑하면서 느낀다.
사랑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 가능할가.
사랑하면서 배우는 것이 아니었던가?
젊은 날의 사랑은 어리석기도하고 그래서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기도 했던
아니 반대로 용감하지도 못했던 사랑들도 많았으리라.
너무도 순수해서...
사랑을 경험해보고 난 뒤의 사랑은 쉬울 수 있을까?
경험해 보았다고 쉬운 것이었다면 누군들 사랑의 경험을 두려워할까.
그렇더라도, 배웠던 배우지 못했던
하나의 세계를 위해서 하나의 세계가 되어주는 사랑은,
살아있음의 증거요 살아있는 인간의 숙명이 아닐까.
힘들어도 아파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생명에겐 양식같은 사랑..
"나는 그 누구에게든 존경과 경의를 표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내 딸이 없었다면 나는 분명히 나보다 못한 사람을 얕보는
오만한 태도를 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능만으로 훌륭한 인간이 될 수 엇음도 배웠습니다."
'나는 결코 체념하지 않고, 내 딸아이를 '자라지 않는 아이'로 만든 운명에 반항할 것입니다.
펄 S 벅 '자라지 않는 아이'
여성으로서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펄 S 벅은
한국의 고아를 포함 국적이 다른 아홉명의 고아들을 입양했지만
그녀의 친자는 중증의 정신지체와 자폐증이 겹친 딸 하나 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가장 어렵게 쓴 책이라고 고백한 <자라지 않는 아이>는
장애자녀를 낳아 길러 본 어머니로서의 체험을 마음으로 토로한 책이라고 합니다.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때의 행복감,
그러나 정신지체아로 일생 동안 '자라지 않는 아이'로 남게 되리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의 절망을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차라리 죽음이 더 편할지 모릅니다. 죽음은 그것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내 딸아이가 지금 죽어 준다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책 말미에
"우리 모녀의 모든 것을 바쳐 다른 사람이 이런 괴로움을 겪지 않도록 힘쓸 수 있다면
우리의 생애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한 희망에서 위안을 찾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생각하는 사람은 물론 나의 어머니이다.
기동력 없는 딸 발붙일 한 뼘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목숨 걸고
'운명에 반항'하여 싸운 나의 어머니.
장애는 곧 죄를 의미하는 사회에서 마음속으로 피를 철철 흘려도
당당하고 의연하게 딸을 지킨 나의 어머니.
무엇보다 이 땅에서 배움의 기회를 얻은 것은 부모님과 내게 너무나 힘겹고 고달픈 싸움이었다.
업어서 교실에 데려다 놓고 밖에서 추위에 떨며 기다리시던 나의 어머니.
장애를 이유로 입학시험 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학교들을 찾아가 제발 응시만이라도
하게 해달라고 사정하며 다니시던 나의 아버지.
아버지를 기다리며 초조하게 문간을 서성이던 나의 어머니.
조금만 도와주면 나도 잘 해낼 수 있다고.
제발 한몫 끼어달라고 애원해도 자꾸 벼랑 끝으로 밀쳐내는
이 세상을 악착같이 메달릴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벨문학상의 위업도 그 위대한 이름. '어머니'에 비할까.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 어디선가 본 책의 제목이다.
사회가 국가가 의무를 소홀히 해도 지금도 어디에선가
'운명에 반항'하여 싸우고 있는 장애아 자식을 가진 어머니들.
그 하느님 같은 어머니들의 외로운 투쟁에 사랑과 갈채를 보내며
나의 어머니와 그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 어머니, 그 위대한 이름으로 - 부분 >
'운명에 반항'하며 싸운 이들의 삶은 아름답다.
그런면에서 장선생의 신체적 불편은 정신적인 성숙을 갈망해내는
용광로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나는 감히 생각해 본다.
장선생의 지적이고 인격적인 성숙은
그녀의 풍부한 독서량과 몸이 자유롭지 못함에서 비롯된 치열한 삶의 편린들로 인해
세상에서 더 강인해질 수 있었던 원천이 되었을 것이기에
그녀의 삶이 더욱 아름다워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감히 짐작해 본다.
그녀가 건강한 동안(3년)은 바쁜 와중에도(서강대 영문과 교수)
밀린원고에 쫒기면서도 칼럼을 계속 쓸수 있었던 것은 독자들을 대한 배려였을 것이다.
목발 때문에 한번도 조카랑 손 잡고 걸어본 적이 없고,
핸드백도 손에 들어 본적이 없는 그런 불편함으로 살았지만
선생의 글 속에서는 그런 신체적인 불편함은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어 더욱 아름답다.
끊임없이 탐구하고 애쓰고 노력하며 정진한 모습만 보인다.
그럼에도 본인은 겸손하다.
그런 자신의 의지와 노력 덕분에 독자들이 누렸을 기쁨과 행복.
'헬렌켈러'나 '펄벅' 못지않게 아름답게 치열하게 사셨으니
이젠 하늘나라에서 원하시던 게으름 맘껏 부리며 그 게으름에 자책없이 편히, 편히 쉬기를.
내가 인상 깊게 읽은 수필은 <사흘만 볼 수 있다면 Three Days to See>이라는 글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잡지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20세기 최고의 수필'로 선정한 이 글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헬렌 켈러의 작품이다.
시각과 청각의 중복장애를 극복한 인간승리의 본보기로 알려져 있지만
그녀는 훌륭한 문필가이기도 했다.
"누구든 젊었을 때 며칠간만이라도 시력이나 청력을 잃어버리는 경험을 하는 것은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로 시작하는 이 글에서 켈러는
'단 사흘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이라는 가정 하에 계획표를 짠다.
방금 숲 속에서 산책하고 돌아온 친구에게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더니,
"뭐 특별한 것 못 봤어"라고 답하더라면서 켈러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질문한다.
"보지 못하는 나는 촉감만으로도 나뭇잎 하나하나의 섬세한 균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봄이면 혹시 동면에서 깨어나는 자연의 첫 징조,
새순이라도 만져질까 살며시 나뭇가지를 쓰다듬어 봅니다.
아주 재수가 좋으면 한껏 노래하는 새의 행복한 전율을 느끼기도 합니다.
때로는 손으로 느끼는 이 모든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으면 하는 갈망에 사로잡힙니다.
촉감으로 그렇게 큰 기쁨을 느낄 수 있는데, 눈으로 보는 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그래서 곡 사흘 동안이라도 볼 수 있다면 무엇이 제일 보고 싶은지 생각해 봅니다.
첫날은 친절과 우정으로 내 삶을 가치 있게 해준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남이 읽어 주는 것을 듣기만 했던
내게 삶의 가장 깊숙한 수로를 전해준 책들을 보고 싶습니다.
오후에는 오랫동안 숲 속을 거닐며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보겠습니다.
찬란한 노을을 볼 수 있다면 그날 밤 아마 나는 잠을 자지 못할 겁니다.
둘째 날은 새벽에 일어나 밤이 낮으로 변하는 기적의 시간을 지켜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날 나는.....,"
이렇게 이어지는 켈러의 사흘간의 환한 세상 계획표는
그 갈증과 열망이 너무 절절해서 멀쩡히 두 눈 뜨고도 제대로 보지 않고 사는 내게는 차리리 충격이다.
그래서 오늘같이 햇빛 화사한 날 신문칼럼이나 쓰고 있어도 헬렌 켈러가 꼭 사흘만이라도 봤으면
좋겠다고 염원하는 이 세상을 나는 사흘이 아니라 석 달, 3년, 아니 어쩌다 재수 좋으면
아직 30년도 더 볼 수 있으니 내 마음은 행복하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 사흘만 볼 수 있다면- 부분
몸은 자유롭지 못하더라도 '마음의 눈'이 밝고 환한사람들.
몸만 자유로운 나는 가끔 이런 글을 접하면 부끄러워진다.
살아있음이 건강함이 이토록 행복일진데 잊고 사는 나를 보기 때문이다.
맑은 공기와 연일 내리는 장맛비, 그리고 신록으로 푸르른 자연과
그리고 언제든 보고 싶으면 볼 수 있는, 고개만 들면 볼수 있는 하늘까지...
이 세상속에 살아 있음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마음의 눈'으로 볼 줄 알아야 정녕 삶의 가치를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멀쩡히 두 눈 뜨고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볼줄 모르고 살지는 말아야 하리라.살아있음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하리라.
그것이 진정 깨어 있는 삶이 아닐까..
입원한 지 3주째, 병실에서 보는 가을 햇살은 더욱 맑고 화사하다.
'생명'을 생각하면 끝없이 마음이 선해지는 것을 느낀다.
행복, 성공, 사랑 - 삶에서 최고의 가치를 갖고 있는 이 단어들도
모두 생명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한낱 군더더기에 불과하다.
'살아 있음'의 축복을 생각하면 한없이 착해지면서 이 세상 모든 사람,
모든 것을 포용하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 벅차다.
그러고 보니 내 병은 더욱더 선한 삶으로 태어나라는 경고인지도 모른다.
입원하고 나흘 만에 통증이 조금 완화되고 나서야 나는 처음으로 다리 보조기를 신고 일어섰다.
그리고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문득 내 발바닥이 땅을 딛고 서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강한 희열이 느껴졌다.
직립인간으로서 직립으로 서 있을 수 잇다는 사실이 얼마나 소중한지,
누워서 보는 하늘이 아니라 서서 보는 하늘은 얼마나 더 화려한지....,
새삼 생각해 보니, 목을 나긋나긋하게 돌리며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있는일,
온몸의 뼈가 울리는 지독한 통증 없이 재채기 한 번을 시원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모르고 살아왔다.
이제 꼭 3년 만에 일단 이 칼럼을 접으려고 한다.
나중에 쓰려고 아껴 두었던 <데미안> <파우스트> <햄릿>등의 작품 등은 이제 훗날로 미루려고 한다.
이책은 2001년 8월 부터 3년간 <조선일보> '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라는
북 칼럼에 게재되었던 글을 모은 것이다.
2004년 9월 장영희선생에게 암선고가 내려지면서 접은 칼럼이다.
건강만 허락 했더라면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계셨다면 아마도 선생은 계속 칼럼을 썼을것이다.
<백지의 도전부분>에서 토해낸 글쓰기의 어려움
그렇더라도 선생은 그 어려움을 분명 즐겼을 것이다.
"나는 이 칼럼을 통해 많은 독자들을 만났다. 마치 숨겨놓은 보석을 한나씩 꺼내 보듯,
일생동안 내 안에 쌓인 책들을 하나씩 꺼내면서 새로운 감회에 젖었고,
위대한 작가들의 재능에 다시 한 번 감탄하며 고맙고 행복했다"
이 책을 내는 장선생의 소회글이다.
이런 매력있는 작업을 해내면서 고민하고 또 고민한 산고의 시간만큼
해산의 기쁨을 맛보았을터이니 얼마나 보람차며 행복했들까.
글쓰기 매력이 이런 것이 아닐까.
그래서 고민할 때는 고민이지만 그것이 어느새 행복으로 전환되고
나중에는 은근 즐기게도 되는 '백지의 도전'은 분명 아름다운 도전이다.
그의 노벨상 수상 연설문에서 윌리엄 포크너는 말했었다.
"문학은 인간이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는가를 가르친다."
그렇다. 문학은 삶의 용기를 , 사랑을, 인간다운 삶을 가르친다.
문학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치열한 삶을, 그들의 투쟁을,
그리고 그들의 승리를 나는 배우고 가르쳤다.
문학의 힘이 단지 허상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도 나는 다시 일어날 것다.
떠나기 전, 감사해야 할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우선 소중한 지면을 내게 할애해 준 신문사에 감사한다.
위대한 작품을 남겨 준 작가들의 재능이 너무 고맙고,
이번 학기 들어 두어 걸핏하면 내 글의 소재가 되는 나의 학생들에게도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글을 읽어 준 독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독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장영희 문학의 숲을 거닐다 - 문학의 힘 - 부분
문학의 최종 목적은 사랑이 아닐까 한다.
장영희 교수는 그걸 찾기 위해 문학의 숲을 거닐었을 듯싶다.
그는 문학에서뿐 아니라 삶 자체에서 부단히 신의 존재와 영혼의 존엄성, 진리와 미,
그리고 사랑과 기도를 믿으려고 애써왔다.
그 값진 노력이 결집된 이 책을 통해 함께 공감하게 됨을 기쁘게 생각한다.
문복(文福)만큼 건강의 복도 함께하길 빈다.
- 피천득 (영문학자, 수필가)
장영희 님은 우리 지상의 삶과 하늘의 섭리를 드러내기 위해 특별히 선택 받은 사람인가 봅니다.
깊은 흐느낌을 삼킨 그의 영혼의 무기는 오직 이 세상과 자신에 대한 감사와 사랑뿐이며,
그는 끝끝내 그 공산한 삶의 길을 지켜가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는 그러한 빛과 향기가 지금껏 만나온 여러 고전 작품들의 감동과 어우러져서
우리 삶과 세상을 밝히는 귀중한 지혜의 보석들로 결정되고 있습니다.
- 이청준 (소설가)
장영희는 정확하고 온화하게, 그리고 표 안 나게 강한 글을 쓴다.
그는 생각의 심지가 굳건하게 아주 깊게 우주에 박혀 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나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장영희는 그런 힘이 있다.
그런 힘은 많은 지식과 긴 연마를 통해서 얻어진다.
이 책은 꿈꿀 수 있는 상상의 씨앗을 한 웅큼 쥐어주며,
힘차게 살아갈 힘을 주는 책이다.
그 것도 문학이라는 향기 나는 처방을 통해서..
-김점선(서양화가)
'화려한 하늘'을 볼 줄 아는 '마음의 눈'으로 오늘도 좋은 날들을 만들어 가기를
이 글을 읽은 분들께 감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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