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기사

'사랑밖엔 난 몰라' 대책없는 이 할아버지

구름뜰 2009. 8. 8. 09:46

대중문화

[즐겨읽기 BOOK] ‘사랑밖엔 난 몰라’대책없는 이 할아버지 [중앙일보]

아흔 살, 애인만 넷 !
마르셀 마티오 지음
이세진 옮김, 끌레마
296쪽, 1만2000원

매일 옷을 단정히 차려입고 자신의 단골 카페를 찾는 한 남자가 있었다. 얼마전 아내를 잃은 그 남자, 혼자 커피를 마시며 노트를 꺼내 이렇게 적었다. “오늘 아침엔 나의 애인 마도를 만났다. 우리는 속궁합이 매우 좋아서 젊을 때보다 한결 섹스가 만족스럽다. 그녀에 대한 사랑은 애들 엄마와는 다른 차원에 속한 것이었다….” (2000년 1월 28일)

남자의 이름은 마르셀 마티오. 당시 나이는 89세. 혹시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그의 노트는 일기장이다. ‘애인’ 마도는 82세. 그에겐 80세 여자친구 루이즈와 각각 78세인 또다른 연인 둘이 더 있다. 믿기 어렵다고? 그 자신도 틈틈이 그렇게 생각했다. “네 여자를 상대하다니! 아흔 살 노인 주제에 ! ”(같은해 5월 2일)

이 책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청춘’으로 산 남자 프랑스 남자 마티오의 일기 중 마지막 5년(89 ~ 93세)의 기록을 엮은 것이다. 그는 열 여섯 살부터 생을 마감하는 아흔 세 살까지 일기(2만1600일, 총 60권)를 77년간 썼다. 책은 그의 아내가 사망한 2000년부터 시작하는데 특히 80대 애인 마도와 열렬하고 관능적인 사랑을 나누는 모습은 읽는 이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할 만큼 충격적이다. “사흘내내 당신은 점점 더 관능적인 포옹으로 나를 단련시켰지” 라는 대목은 가장 점잖은 표현에 속한다.

‘평균적 노화’에 역행하는 마티오의 삶은 ‘상식’과 ‘체면’에 집착하는 우리네 시선으로 볼 때 받아들이기 곤혹스러워 ‘노망’으로 비칠 대목이 부지기수다. 그럼에도 뻔뻔하지만 솔직하고, 유별나게 낙천적인 그의 모습은 ‘나이’에 갇혀 사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하는 반전의 힘을 발휘한다. “젊은이나 좀 덜 늙은 사람들과 부대끼고 싶어 일부러 버스를 타고”, 노인회관에서 식사하면서 “이 무리 속에서 나 혼자 젊은 사람같은 기분”(91세의 나이에!)이라고 되뇌인다. “1984년…당시에 나는 70대였고 (애인)엘렌은 62세였지만 우리는 참으로 파릇파릇했다!”는 대목에선 슬며시 웃음이 나오면서도 마음이 짠해진다.

그의 유머와 솔직함은 삶을 마감하기 바로 직전인 2004년에 초에 쓴 일기에서도 빛난다. “이제 끝에 이르렀나보다. 그런데 무슨 병명으로 죽게 되려나?”하고 푸념하면서도 “간호사들이 죄다 납작 가슴이다. 딱 한 명만 가슴이 제대로 달렸다”고 적었다.

책엔 한 세기를 온전히 살아온 이가 선사하는 삶의 찬가가 애틋하게 담겼다. 그리고 책을 덮으며 드는 생각 하나. 일기가 그에겐 젊음의 묘약이 아니었을까. 덕분에 그는 끊임없이 청년시절의 일기를 들추며 그때의 감정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은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