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기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도종환

구름뜰 2010. 1. 4. 09:17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 흔들리며 피는 꽃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린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하착 (放下着)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단풍드는 날

 

 

 

가장 높은 곳에 있을 때

가장 고요해지는 사랑이 깊은 사랑이다.

나릿재 밑에 나리소 못이 가장 깊고 고요하듯

요란하고 진부한 수식이 많은 사랑은

얕은 여울을 건너고 있는 사랑이다.

사랑도 흐르다 깊은 곳을 만나야 한다.

여울을 건너올 때 강물을 현란하게 장식하던 햇살도

나리소 앞에서는 그 반짝거림을 거두고 조용해지듯

한 사람을 사랑하는 동안 마음이 가장 깊고

착해지지 않으면 진짜 사랑 아니다

물빛처럼 맑고 투명하고 선해지지 않으면

- 나리소 

 

 

자작나무처럼 나도 추운 데서 자랐다

자작나무처럼 나도 맑지만 창백한 모습이었다.

자작나무처럼 나도 꽃은 제대로 피우지 못하면서

꿈의 키만 높게 키웠다.

내가 자라던 곳에는 어려서부터 바람이 차게 불고

나이 들어서도 눈보라 심했다.

그러나 눈보라 북서풍 아니었다면

곧고 맑은 나무로 자라지 못했을 것이다.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몸짓 지니지 못했을 것이다.

외롭고 깊은 곳에 살면서도

혼자 있을 때보다 숲이 되어 있을 때

더 아름다운 나무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 자작나무 

 

 

이 세상에는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은 외로움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아무와도 나누어가질 수 없는 아픔이 있습니다.

마음 하나 버리지 못해

이 세상에는 지워지지 않은 그리움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 외로움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 아픔 그 그리움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먼 곳에 계신 당신을 생각하며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기다림으로 살아가는 세월이 있습니다.

- 이 세상에는

 

 

열정이 식은 뒤에도

사랑해야 하는 날들은 있다

 

벅찬 감동 사라진 뒤에도

부둥켜안고 가야 할 사람이 있다

 

끓어오르던 체온을 식히며

고요히 눈감기 시작하는 저녁하늘로

쓸쓸히 날아가는 트럼펫 소리

 

사라진 것들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풀이란 풀 다 시들고

잎이란 잎 다 진 뒤에도

떠나야 할 길이 있고

 

이정표 잃은 뒤에도

찾아가야 할 땅이 있다.

뜨겁던 날들은 다시 오지 않겠지만

거기서부터 또 시작해야 할 사랑이 있다.

- 저녁 무렵

 

 

 

 

마음이 울적할 때

저녁 강물 같은 벗 하나 있었으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그리메처럼 어두워질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울리지 않은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때

낮은 소리로 내게 오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게 노래가 되어 들에 가득 번지는 벗 하나 있었으면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지쳐 있는데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주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흑 속에서도 다시 먼 길 갈 수 있는 벗 하나

있었으면

- 벗 하나 있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