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기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 은희경

구름뜰 2010. 1. 6. 15:00

 

 

이 책은 신문사에 연재한 원고를 손질 탈고한 것이라고 한다.

  은희경 작가가 연재하는 동안  주부들의 향변이나, 또는 의도적으로 야하게 쓴다는 비난까지

주인공 진희의 사랑법에 공감하는 독자보다 성토한 독자들이 많아

마음고생 좀 하면서 쓴 글이었던 것 같다.

96년도에 신문 연재한것이니 지금부터 13-4년 정도 되었다.

 

주인공 진희는 돌아온 싱글이고 대학교수인데 세명의 남성과 사귀고 있다.

자유롭게,, 사랑하고 싶을때 사랑하는,, 걸릴것도 없는 그녀의 모습에

당시 더욱 화제가 되지 않았을까 . 작가가 욕을 많이 먹었을 것 같다.ㅎㅎ

그녀와 사랑을 나누는 세 남자중 둘은 유부남이다.

 

싱글인 현석은 그런 그녀를 끝까지 사랑하고 청혼하지만 거절당한다.

 

 진희의 사랑 방식은 세상에서 소통불가능한 것이고

 그런 인간사이기에 그녀의 사랑은 진심이고 진실일지라도

타인에겐 허구이며 허상일 수 밖에 없는 미친짓이 되는 것이다.

 

그녀 곁에는 아무도 없다.

 신나게 놀다  어둠이 오면 놀다간 흔적만 남은 빈 논바닥처럼,,,

그런 진희는 전남편과의 약속장소에서 그를 기다리는 모습으로 끝난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이전의 자기모습,

 전남편을 사랑했던 그 사랑에 귀착하고 싶어하는 상징적인 의미 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랑은 자유를 배신하고 법치주의를 배신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하고,

지속되기를 거부함으로써 사랑 자체를 배신한다.

사랑은 나 스스로 만든 환상을 깨뜨려서 나 자신까지도 배신하다.

사랑에서 환상을 깨는 것이 배신의 역할이다.

환상이 하나하나 깨지는 것이 바로 사랑이 완결되어지는 과정이라면,

사랑은 배신에 의해 완성되는 셈이다.

사랑은 환상으로 시작되며,

모든 환상이 깨지고 난 뒤 그런데도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그를 사랑하게 되어버린 것을 깨달으면서 완성되고, 그러고도 끝난다.

--사랑의 진위는 환상이 필요 없을 때 판가름 나는 모양이다.

셋이 좋은 이유 - 부분

 

사랑의 진위는 환상이 필요 없을때 판가름 나는 것,

그랬던가...환상속의 머무르는 일이 사랑의 시작이라면 

 환상이 깨지고 실체가 드러났을 때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는 일.

그래도 여전히 사랑하는 일이 참사랑일까.

 

셋이어서 사랑의 진위가 판가름 나더라도 3분의 1만큼 아플것이라는,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한사람과의 사랑보다는 더 많은 사랑을 갈구하는

진희의 사랑은 언제라도 주변인으로 돌아설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랑이다.

 

 사랑이 계획한다고 그러기로 작정한다고 그리 되는 일이던가.

단지 변명이고 희망사항 일 뿐인것을.. 삶에는 얼마나 많은 변화구가 기다리는 지

 그 변화구의 실체를 경험하는 일은 사랑의 진위가 어떻튼

내게 사랑이면 그것으로 족해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것이 변화구에 적응하는 삶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물론 고통스럽다.

그러나 세상에 고통은 있게 마련이고, 나에게 그 고통이 오지 말란 법은 없다.

마침 지금 고통의 시간이 왔을 뿐이다.

머리 위의 구름처럼, 시간이란 머무는 것 같지만 결국은 흘러가버리는 존재이다.

이 시간은 반드시 지나갈 것이고 다시 다른 시간이 머리 위에 드리워진다.

지나간다는 것을 알면 고통을 견디기가 조금은 나아진다.

이런 것을 두고 옛사람들은 세월이 못 고칠 병은 없다고 표현한 모양이다.

옛사람들 역시 알았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간다는 말은 고통스러운 시간이나 행복한 시간 모두에 해당된다.

행복한 시간도 흘러가버리는 한순간일 뿐이라는 사실이

고통스러운 사람에게는 행복을 놓친데 대한 핑계가 되기도 한다.

-- 

사람은 언젠가는 떠난다.

그러니 당장 사람을 붙드는 것보다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훼손시키지 않고 보전하는것이 더 낫다.

그것은 내가 끊임없이 사랑을 원하게 되는 비결이기도 하다.

사람은 떠나보내더라도 사랑은 간직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 사랑을 할 수가 있다.

사랑에 환멸을 느껴버린다면 큰일이다.

삶이라는 상처를 덮어갈 소독된 거즈를 송두리째 잃어버리는 꼴이다.

악역의 즐거움 부분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야 할 때가 있다.

 너 없이는 안 될 것 같아 떠나보내지 못해 울던 날이 있었어도

 이 사람뿐이라고 생각했던 날이 있었더라도...

 그것이  환상인줄 알았는데 실체로 드러나 여전히 사랑이더라도

곁에 둘 수 없는 사랑도 있다. 숙명처럼 보내야할 사랑,,,

 

그런 사랑은 그 때가 왔음을 알아가는 과정이 그 사랑과의 여정인지도 모른다.

 

그 여정에서 울지도 못하고, 토해내지도 못했다면 깨지 못한 환상때문에,

 더 큰 그리움으로 아프게 남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사랑하고 보내는 일은 사랑하지도 못하고 보내는 것보다 축복이다.

   사랑했던 추억하나는 남는 일이 될 것이므로.. .

 

사랑도, 행복도  순간일 지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 때문에 순간아닌 삶을  잘 살 수 있게 되는 게 아닐까.

 

 

 

이 감정이 사랑인지 아닌지.

상대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아닌지 따져보는 데서

사랑할 시간을 다 써버리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사랑은 누가 선물하는 것이 아니다.

저절로 오는 운명 따위는 더더욱 아니다.

사랑을 하고 안 하고는 취향이며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엄연한 능력이다.

 

좋은 길을 가르쳐주는데도 나쁜 길로 접어들게

되고 직접 겪고 나서 후회하게 돼 있는것.

또 그런 다음 다른 사람에게 그 길로 가지 말라고 쓸데없는

안타까움을 갖게 되는 허무한 재귀가 인생인 모양이다.

잘못되리라는 걸 알면서도 해야 하는 일이 있고,

벗어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가까이 죄어드는 운명이 누구에게나 있다.

 

그때 나는 종태가 했던 수많은 맹세를 생각했다.

맹세란 지키고 싶을 때만 유효하다.

모든 사랑의 맹세는 진실하지만,

사랑이 떠난 다음까지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그 맹세를 지킬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누구나 사랑할 때만 맹세를 지킨다.

그러므로 맹세란 아무 구속력도 없는 것이다.

맹세가 효력이 있는 것은 희망 없는 사람들에게 최후의 위로로 쓰일 때뿐이다.

개 이야기 부분

 

 

 보내주어야 하는 사랑도 있고 끝까지 깨어진 실체라도 끌어안고 지켜야 하는 사랑도 있다.

축복받지 못하는 사랑도 있고, 축복과는 상관없이 지켜야하는 사랑도 있다.

사랑이 취향이며 능력이라는 것,, 이런 능력도 취향도 지켜야하는 사랑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잘못되리라는 걸 알면서도 하고 싶은 일이 있고

벗어나려고 애쓸수록 가까이 죄어드는 운명은 누구에게나 있다>

 

 맹세가 아무리 진실이었더라도 지켜선 안되는 사랑앞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이 의미있는 것은 실체인 대상이전의 환상속의 그대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랑할때만 지켜지며 희망없는 사람들에게 최후의 위로로 남는 다는..

 맹세가 그렇게 허무한 것이라면, 그런 맹세도 없었던 사랑은 또 얼마나 허망할까.

 

 

 

나는 이제는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그를 막막히 쳐다보았다.

내 삶에 다시 그를 만날 일이 있을까?

어제까지 함께 살던 사람이 단 하루가 지난 뒤 다시는 만나지 않을 관계가 된다.

세상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모든  일은 흘러가는 것이고 흘러가면 그만이었다.

붙드는 순간 흘러가버리는 것에 집착한다는 것은 모두 쓸쓸했다.

마치 흘러가버리는 인생의 시간에 순응하듯 나는 택시의 흔들림에 몸을 맡겼었다.

환멸과 그리움 사이 부분

 

 

'붙들려는 순간 흘러가버리는 것에 집착한다는 것은 모두 쓸쓸했다.'

 

두사람이 사랑을 한다.

  여자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들어주고 배려해주는 남자와 

그런 그를 너무도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

둘 사이엔 시차가 존재한다.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시차가 존재한다.

남자의 속 깊은 배려가, 그녀의 뜨거운 열정이 시차가 된다.

그렇더라도 그 남자는 언제나 그녀를 사려깊게 배려해준다.

그럴 때마다 그런 그가 고맙기도 하지만, 그가 보는 자신을 그를 통해 보게 된다.

그 처연함이 아름답기보다는 눈물겨운 일이란걸 알게된다.

그리고 자기연민도 자기애도 아닌 처연함은 빛을 잃는다.

 왜 일까.... 그런 시차는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언제나 그리워만 하는 것 같은 사랑도 사랑이고.

언제나 배려만 해주는 사랑도 사랑이지만

사랑도 성격인지라 성격차이로 헤어지는 부부가 그래서 많은지도 모른다.

사랑하지만 사랑할줄을 몰라서..

 

 

 

사랑이란 자꾸 표현하고 싶은 감정이다.

그래서 빤히 아는 사실인 '사랑한다'는 말을 자꾸만 되풀이해서 말하는것이고

선물을 주고 싶어지며 호출기에 '잘자'라는 메시지를 남기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지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그러고도 아직 마음속의 것을 아직 다 털어내 보인 것 같지 않아 미진한 것이 사랑이다.

그런때에 섹스만큼 간절하고 격정적인 사랑의 표현은 없을 것이다.

섹스를 통해서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나면 조금은 속이 후련해진다.

고양될 때로 고양된 감정 속에서 서로의 최후가 맞닿아 일치되는 기분,

섹스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섹스는 맛있는 음식처럼 위로의 경로가 되기도 한다.

오래 전 읽었던 한 젊은 여성의 자전적인 글에서처럼 말이다.

그녀는 대학 동창인 남편과 처음 만날 날부터 사랑에 빠졌고 오직 그 한 사람만을 사랑했다.

그러나 남편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혼자 살아 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울고 있을 때,

또 한 사람의 대학 동창이자 친구의 남편이기도 한 남자가 찾아왔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섹스를 나누었다.

그가 돌아간 뒤 그녀는 마음이 가라앉았고 앞으로 살아갈 일을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그녀가 사랑하는 것은 여전히 남편뿐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조금 전 섹스의 기억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은 육체 안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섹스는 가장 즐겁고 복잡하고 신기한 게임이다.

네트워크로 연결해서 함께 하는 스타 크래프트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

정해진 규칙을 따르는 게 아니라 프로그래밍에서부터 게임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거기 몰두하다 보변 먼저 너와 나라는 모든 구분과 경계가 사라진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육체까지도 사라져버리는 소멸의 극치감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한몸이 되고자 하는 인간끼리의 다정함이다.

나에 대한 타당한 오해들 2- 부분

 

 "한몸이 되고자 하는 인간끼리의 다정함"이라고 표현한 사랑,,

사랑하면 안고 싶어지고 표현하고 싶어지는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우리삶을 얼마나 황홀하고 아름답게 하는지...

 

사랑의 완성은 한몸이 되고자 하는 그 다정함이라는 것을 어찌 모를까.

하지만 그 한몸이 또 다른 누군가와도 가능한 한몸이라면

그 사랑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싶은 생각은 없을지라도

그 사랑이 온전하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사랑하는 이를 알 수 없을 때

비로소 사랑한다고 말해도 되는 게 아닐까.

--이유가 있는 사랑은 상대로 하여금

이유를 제공해야 하는 부담을 준다

사랑이 무거워지는 것이다.

 

누구나 다  남을 상처입히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일은 매일 일어난다.

내가 맞은 화살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일일이 추적할수도 없거니와
바람이 불어 내 쪽으로 날아온 것을 두고 책임 추궁을 하려다가는

자기 연민만 많아질 뿐이다.

나는 누구에게 용서를 빌지도 않지만

내게 용서를 빌어야 하는 사람과 오래 대면하고 싶지도 않다.

 

뒤돌아 보기도 싫었고 서운해 하기도 싫었다.

사람의 삶에 헤어짐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음을 완전히 부려놓을 수 있는 장소,

거기에서 영원히 멈출 만한 시간이란 없었다.

삶은 흘러가는 것이다.

그 흐름에 따라 주소를 옳기는 것뿐인데

일일이 헤어짐을 기억할 필요는 없다.

모든 사람은 끝을 향해서 가고 있다.

누군가 스톱 워치를 누르고 묻는다.

괜찮아요? 아직은 요, 자, 그럼 또 시작하죠......

그러니 걸어갈 뿐이다. 아직은 괜찮다.

아직은 괜찮다 부분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에 치명적인 상처를 받는 일이 있다.

돌아보면 개연성이 전혀 없진 않지만 그에 비해 내게 큰 상처를 남기는 일은

세상살이에서 비일비재하다. 허탈하고 기막히지만

내가 그런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것이 변화무쌍한 삶의 단면이다.

어디서 화살이 날아왔는지 추적할 수도 없거니와,

바람의 영향도 있을 것이므로 바람이나 화살에게 책임추궁 할 수도 없는 일.

 

뒤돌아 보기도 싫고 서운해 하기도 싫은 이런 과정,

삶은 흘러가는 것이고 이것 또한 흘러가리라는 마음으로 보내야 하는 것들.. 

자기연민도 필요없고 아직은 괜찮다라는 마음과,,

그래 또  시작하자.. 오늘을 열심히 살자

하는 마음만 필요한 것이란걸..

숨쉬고 있는 동안은 살만한 것이 세상이고 살아야 하기에..

 

 

 

"맞아, 그런 일이 힘들어서 몇 번인가 당신하고 정말 헤어질뻔 했지.

당신도 아다시피 나는 배타적이고 자기애가 강하잖아.

당신이 아니었다면 나는 남을 사랑하는 것이 뭔지 끝까지 몰랐을지도 몰라. 난 운이 좋았어.

진정으로 남을 사랑해본 사람이 그렇게 많진 않을거야."

"남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는 없어. 사랑이란 다 변형된 자기애일 뿐이야.

그런 감정이 필요하니까. 자기 최면을 거는 거라구. 지속되는 사랑이란 건 없어."

"내 감정은 내가 알아."

"나도 당신을 사랑해. 하지만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퇴색하게 마련이야.

어떤 날인가는 난 아마 지금 당신한테 품는 것과 똑같은 감정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될거야.

누구라도 받아들일 수 있어."

 

-

"나는 희망을 갖는 일이 두려워. 결국 적응하게 되고. 지속되기를 바라고 그런 것들 모두.

희망을 가지는 것은 뭔가를 믿는다는거야. 당신은 그 결과가 무엇이라고 생각해?

삶은 늘 우리를 속인다구. 삶은 말야. 믿으라고  있는 게 아니야. 배신을 가르쳐주기 위해 있는거야."

"의심하는 사람에게는 그렇겠지."

"무슨 뜻인지 알아. 아주 못 믿을 건 아니지. 조금은 믿게 해줘. 말하자면

당신의 청혼 같은 그런 희망. 기쁨의 순간이 있어. 그러나 그것은 스쳐가는 일이야.

거기에 집착하면 인생이 무거워져. 빗방울처럼 발밑으로 떨어진다구."

의심을 찬양함 부분

 

진희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현석, 

  결혼을 원하지만 진희는 결혼자체를 거부한다. 그냥 사랑하는 것으로 족하다.

그녀가 현석을 사랑하지 않기때문에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진희의 사랑은 언제나 누군가를 향하고 있지만 그 누구도 향하지 못하는 사랑이다.

상처가 두렵고 사랑하는 것이 두려운,,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은..

 

허구인 소설의 아니러니는 이런 주인공 옆에는 언제나 다 이해해주는

 '약간 모자란'이 아니라 '매우 똑똑한' 남자가 있다는 것이다.  소설에서만 가능한 이야기..

  환타지를 좋아하고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들을 엿보고 맛보는 것 같은 쾌감..

 

그렇지만 그런 소설의 백미는 현실감이다.

냉혹한 현실로 결말지어졌을 때 그 소설을 읽는 이도 정신 차리게 되는...

 진희의 사랑이 자신이 한 일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로 언론에 오르내리고

권고사직 이전에 알아서 떠날수 밖에 없는 냉혹한 현실앞에 맞닥뜨렸을 때..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다.

그것이 바람에 묻어온 화살처럼, 자기와는 상관없는 사건이 발단 되어

자신이 다치게 되는 이런 아이러니..

그렇지만 세상은 그 화살이  어느 방향에서 왔든 누가 쐈는지는 중요하지도 않으며

냉혹한 현실에서는 화살만이 실체로 남을 뿐인 것이다.

 

 

 

누구나 마지막 춤 상대가 되기를 원한다.

마지막 사랑이 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마지막이 언제 오는지 아는 사람이 누구인가.

음악이 언제 끊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마지막 춤의 대상이란 존재하지 않은다.

지금의 상대와의 춤을 즐기는 것이 마지막 춤을 추는 방법이다.

마지막 춤을 추자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대답하면 된다.

사랑은 배신에 의해 완성된다고.

취한밤 -부분

 

 

누구나 마지막 사랑을 꿈꾼다.

그 마지막은 언제나 지금이며 오늘이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과의 오늘이 마지막인 것이다.

 

사랑이 배신으로 완성된다 해도 추억은 남는다.

 사랑 했던 한사람을 떠나보냈더라도 진실했다면 그것으로 족해야 한다.

진희는 매번 진실한 사랑을  했을지 모른다.

떠나보낸 사랑은 추억속에 남고 

함께 할 수 있는 사랑은 오늘에 있는 것.

진희가 사랑한 것은 어쩌면 자기자신 뿐이었는지 모른다.

나를 넘어 그를 사랑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 사랑은

추억도 아름답지 않을 것 같다.

 

사랑은 배신에 의해 완성된다고..

사랑의 완성은 한몸이 되고자 하는 그 다정함이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랑은 배신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추억에 의해 완성되는 게 아닐까.

  

 

  

이 소설은 96년 신문에 연재했던 글이다. 지금의 나라면 이렇게 쓰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내 방식대로 이 글을 고치려 해보았지만 오래 고치다 보니 처음 원고와 거의 비슷해졌다.

그때 갖고 있언 마음의 질서를 조금 간결하게 만드는 정도로만 손질해서 원고를 탈고했다.

지금의 내가 나의 확정된 전부는 아니듯이 그때의 나 또한 돌이 킬 수 없이 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모양이다.

 

나는 그때와 조금은 다르다. 그때 내 곁에 있던 사람 중에는 떠난 이도 있고 죽어버린 이도 있다.

그때 이후 내 삶에 등장해 지금과 같이 나를 바꿔놓은 이도 있다. 그리고 소설을 왜 쓰는가 하는,

너무나 당연해서 나를 짜증나게 했던 질문에 대해 뭐하고 대답했던지 요즘은 문득 등골이 오싹하다.

하지만 제 3의 지점을 찾아내려 한다는 점에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의 길로만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람에 대한 내 나름의 애정이 넘쳐 이 소설에 많은 사족을 만들었다.

 

글을 쓰는 일에는 오만함이 하나의 추진력이 되는 것 같다.

그점에서 나는 조건을 갖추지 못햇다. 대신 시간과, 그리고 k의 도움으로 이 소설을 마칠 수 있었다.

누군가의 말대로 쓰게 만드는 것은 칭찬이다. 비록 잘쓰게 만들기까지는 못한다 해도.

뭐하러 이걸 썼는가. 책을 낼 때마다 나를 붇들고 놓아주지 않은 이 질문에도

 k의 말을 잠깐 빌려보겠다. 

"Everybod's doing a brand new dance on baby do the locomotion.

그가 취했을 때 부르곤 하는 노래 가사이다.

작가후기- 은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