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수필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구름뜰 2010. 1. 12. 09:20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