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기

능소화 - 조두진

구름뜰 2011. 1. 18. 10:52

 

 


원이 아버지에게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가 희어질 때까지 살다가 함게 죽자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 저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저와 어린아이는 이제 누구 말을 듣고, 누구를 의지하며 살라고 먼저 가십니까? 당신 저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오셨나요? 저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나요? 함게 누우면 언제나 저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당신은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잊으셨나요? 그런 일을 잊지 않으셧다면 어찌 저를 버리고 그렇게 가시는지요?  

 

당신을 잃어버리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수 없어요. 빨리 당신에게 가고 싶어요. 어서 저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는 잊을 수가 없어요. 이 서러운 마음을 어찌할까요? 이제 제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까요. 어린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아갈 날을 생각하니 아득하기만 합니다.

 

이내 편지 보시고 제 꿈에 와서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어째서 그토록 서둘러 가셨는지요? 어디로 가고 계시는지요? 언제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는지요? 우리는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지요? 어떤 운명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셨지요? 우리 함께 죽어 몸이 썩더라도 우리는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지요? 저는 그 말씀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편지를 써서 넣어드립니다. 당신. 제 꿈에 오셔서 우리 약속을 잊지 않았다고 말씀해 주세요. 어디에 계신지 . 우리가 언제 다시 만날지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당신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이 있다고 하셨지요?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을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시라는 것인지요?

 

아무리 한들 제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제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를 자세히 보시고 제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말씀해주세요. 저는 꿈에서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아무도 몰래 오셔서 보여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습니다.

-병술년 (1586년) 유월 초하룻날 아내

소설 능소화의 모티브가 된 420여 년 전의 원이 엄마의 육필서한을 현대어로 올린 글이다.

 

 

 

 

1998년, 택지 개발이 한창이던 경북 안동시 정상동 기슭에서 주인 모를

무덤 한 기의 이장(移葬) 작업이 있었다.

시신을 보호하는 외관(外棺)은 갓 베어 놓은 듯 나뭇결이 살아 있어

혹시 최근에 조성된 무덤이 아닌가 추측 되기도 했다.

그러나 야간까지 이어진 유물 수습 과정에서 무덤은 수백 년 전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유물을 절반쯤 수습했을 무렵 망자의 가슴에 덮인 한지(韓紙)를

조심스레 벗겨서 돌려 보니 한글로 쓴 편지가 있었다.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을 맞으며 아내가 쓴 이 편지는 수백 년 동안

 망자(亡者)와 함께 어두운 무덤 속에 잠들어 있다가 이장하는 과정에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고스란히 전하며 심금을 울렸던 이 편지는

남편의 장례 전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씌어진 죽은 남편에게 그 아내가

꿈속에서라도 다시 보기를 바란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아내는 지아비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으로 하고픈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종이가 다하자  모서리를 돌려 써내려 갔다.

모서리를 채우고도 차마 끝을 맺지 못하자 아내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거꾸로 적어 나갔다.





이 편지 외에도 많은 유물들이 수습되었는데

남편의 머리맡에서 나온 유물은 특히 눈길을 끌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파악되지 않았지만 겉을 싸고 있던

한지를 찬찬히 벗겨 내자 미투리의 몸체가 드러났다.

조선시대에는 관 속에 신발을 따로 넣는 경우가 드문데다 미투리를 삼은

재료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져 이 미투리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검사 결과 미투리의 재료는 머리카락으로 확인되었다.

 

왜 머리카락으로 미투리를 삼았는지 그 까닭은 신발을 싸고 있던 한지에서 밝혀졌다.

한지는 많이 훼손되어 글을 드문드문 읽을 수 있었다.

"내 머리 버혀........(머리카락을 잘라 신을 삼았다)"

그리고 끝에는 "이 신 신어 보지..........(못하고 돌아가셨다)"는

내용들이 얼핏얼핏 보였다.

편지를 쓸 당시 병석에 있던 남편이 다시 건강해져 이 미투리를 신게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머리를 풀어 미투리를 삼았던 것이다.

아내의 헌신적인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죽자

그녀는 이 미투리를 남편과 함께 묻은 것이다.




유물 중엔 아내의 편지 외에도 2편의 시와 11통의 서신이 있었다.

이 편지들 가운데 9통은 망자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낸 것으로,

모두 묻힌 이가 죽기 1년 전에 쓴 것들이었다.

 

한문 초서로 흘려 쓴 이 편지에서도 중요한 단서가 발견 되었다.

아들 응태에게 부치는 편지(子應台寄書)에서 피장자의 이름이 응태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또한, "31년 아우와 함께했다"는 형의 글에서 뭍힌 이가

서른한 살에 죽었음을 알 수 있었다.

유물에서 확인한 단서를 정리하면 묻힌 이는 고성(固城) 李氏 가문의 응태라는남자였고

그에겐 형이 있었으며 서른한 살(1586년)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편지에서 아내는 남편을 자내(자네)라고 부르기까지한다.

"자내다려 내 닐오되(당신에게 내가 말하기를)........". 

"자내 몬저 가시난고(당신 먼저 가시나요).......". 등

이응태의 처는 남편을 가리켜 "자내"라는 말을 모두 14번 사용했다.

요즘 부부라 하더라도 아내가 남편을 자네라고 부르는

경우는 드문데 어떻게 자내란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었을까?

 

순천 김씨의 간찰(簡札)에서 아내가 남편을 그 사람이란 의미의 3인칭으로

지칭한 예는 있어도 이 시기에 씌어진 글에서 아내가 남편을 대놓고

"자내"라고 부르는 경우는 그동안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응태 처의 편지는 임진왜란 전까지 부부가 모두 자내라는 말을 사용했음을 알려준다.

 

기본적으로 이런 "하소체"는 서로 대등한 관계로 보아야 한다.

이응태 아내의 편지는 그들이 살던 시대에 남녀가 대등한 관계였음을 시사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와는 동떨어진 모습이다.

 

400년 전 진실로 서로를 사랑하며 백발이 될 때까지 함께 해로하고자

소망했던 이응태 부부의 육신은 비록 떨어져 있을지언정 그들의 영혼은

지난 세월 동안에도 줄곧 함께였다.

죽음조차 갈라 놓을 수 없던 이응태 부부의 사랑,

긴 어둠의 세월 속에서 이 사랑을 지켜온 것은 아내가 써서

남편의 가슴에 고이 품어 묻어둔 마지막 편지였다.

---인터넷 기사에서 옮겨온 글 일부..

 

 

 

소설 '능소화'는 조두진씨가 원이 엄마의 서한을 모티브로 쓴 글이다.

 

1998년 파묘 작업후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영역을 나눠서 연구에 들어갔다고 한다.

주변의 다른 무덤과 달리 유독 이 무덤의 시신만 썩지 않은 이유등을 알기위해

지질학적 연구와 그 시대 복식 연구등 조두진씨는 서한을 판독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고어라고는 해도 한글 서한이라서 보름 정도만에 판독작업은 끝났다고 한다.

 

그리고는 잊고 있었는데 일본의 간사이 외국어대학교  한국어과

기타노노부시 교수로 부터 전화가 왔고 자신에게

4백여년 전의 조선 여인의 글이 있는데

그 글이 무덤에서 나온 미라와 연관이 있는 듯하다고

 두글의 연관성을 판단해 달라는 요청과 함께 그 글의

원본 몇장과 복사본 수집 장을 들고 찾아왔다고 한다.

 

 

그 글을 간사이 대학교에 맡긴 모리타라는 사람은 일본정계에까지

영향을 미친 이름난 협객이며 그의 먼 할아버지모리타는 

임진년 조선 징벌에 통역병으로 참전했었다고 한다.

 

경상도 지방을 두루거쳐 안동에서 그가 속한 군대는 큰 비를 만났고 보름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마을에 처박혀 지내게 되었고 그 당신 안동 조선인들은 대부분 일찌감치 피난을 떠난 상태라,

빈집이 많았다고 한다. 그때 발견한 것이 이 서한이고,

통역병인 모리타는 조선어를 읽고 쓸 줄 알았으며 자신이 발견한 글이

군사전략상 도움이 될 만한 문서가 아님을 알았지만

부부간의 안타깝고도 아름다운 사연을 담은 데다 그 문체가 기품이 있어 다로 보관했다고 한다.

--모리타 나오토  조선출병기 2권 129쪽)

 

 

기타노 교수가 가져온 조선 여인의 글에는

간단한 제목이 있을 뿐 날짜도 글쓴이도 드러나지 않았고,

그것이 안동의 미라에서 발견한 이의 아내가 쓴 글이라는 명확한 증거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덤속 글이 원이 아버지께로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타노 교수가 가져온 글에도 아들 원이에 대한 이야기가 포함돼 있다는 점이

동일인의 글이라는 확신을 갖게 햇다고 한다.

 

그 글은 그들 부부가 만났을 때부터 남편이 병으로 죽을때까지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응태가 요절한 나이가 1586년 임진왜란 (1592~1598년)에 참전한 모리타 나오토가

이글을 안동에서 발견했다는 점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아귀가 맞았고,

무덤 서한과 기타노 교수가 가져온 글에 등장하는 원이는

아무리 봐도 같은 인물같았다고 한다.

 

 

'무덤에서 나온 글뿐만 아니라 기타노 교수가 가져온 글에도

날짜가 없었기 때문에 정확한 순서를  알 수는 없었다.

나는 사건의 정황에 따라 순서를 조정하고 부족한 부분엔

이음매를 보충해 한 편dml 이야기로 역었다.

물론 내가 조정한 순서와 덧붙인 이음새가 당신의 상황을

그대로 재현했다고 보는 데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작가가 밝힌 실화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능소화의 탄생배경이다.

 

 

소설은 원이 아버지인 이응태가 타고난 액운을 막을려면 처가살이를 권하는

어느 스님의 말씀을 응태의 아버지가 듣고 처가에서 살게된다.

원이 엄마인 여늬는 무남독녀로 역시나 타고난 액운을 막아야 한다며

결혼정년기가 되도록 집 밖 출입을 삼가하도록 한 그런 운명을 타고 난다.

 

그렇지만 능소화가 활짝 핀 어느날 담밖을 내다보던 여늬의 눈에  띈 이응태는

운명적인 끌림인지 만나게 되고 둘은 얼굴도 모르고 결혼을 하게 되지만

서로 그 사람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시들시들 앓아가는 남편을 보면서

굿도 하고 별것을 다 해보지만 남편과의 결혼 생활은 짧게 끝난다.

남편이 죽을 무렵 안동의 시댁으로 들어가 살게되고

시아버지의 사랑을 받지만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원이와 원이 동생을 두고 친정으로 돌아와서 살게된다.

 

 

 

운명은 사람의 인격과 육체를 가둔다고 하지요.

운명을 거부하며 몸부림치는 사람은 절망을 확인할 뿐이라고 하지요.

허나 저는 다시 소화를 심습니다.

꽃은 계절에 맞춰 피고 질 것입니다.

 

햇볕을 반겨 피는 소화는 괄목수(능소화 가진 이를 저주하는 일종의 악마)라도 어찌 못할 것입니다.

소화와 더불어 저는 당신이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릴 것입니다.

붉고 큰 꽃을 피워 멀리서도 당신이 알아볼 수 있게 할 것입니다.

당신은 친정집 담 밖으로 핀 소화꽃을 보고 저를 알아보셨다 하셨지요.

 

오늘 뒤뜰에 한 그루 남은 소화에서 가지를 넉넉히 꺽어 부드러운 땅에 묻고 물을 뿌렸습니다.

달포가 못 되어 성긴 뿌리가 나올 테지요. 뿌리 먼저 난 나무는 서둘러 캐어 당신 무덤 앞에 심고,

나머지는 저 죽거든 무덤 앞에 심어 달라고 단단히 일러두었습니다.

상주댁이 놀란 눈으로 저를 봅니다. 밝은 미소지었더니 그제야 그니의 얼굴이 풀립니다.

 

담 안팎에 어제 심은 소화의 이름을 능소화라 하였습니다.

하늘을 능히 이기는 꽃이라 제가 이름지었습니다.

저는 괄목수라가 가둔 우리의 운명을 거역할 것입니다.

오래전에 괄목수라는 말했습니다.

사람이 잊지 못할 추억은 없다고, 사람이 이기지 못할 슬픔은 없다고,

아물지 않을 상처 따위는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남편 잃고 자식 잃은 슬픔을 잊을 수도,이길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함께 거닐던 날들일 잊지 못합니다.

이제 능소화를 심어 하늘이 정한 사람의 운명을 거역하고, 우리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립니다.

 

바람이 불어 봄꽃이 피고 진 다음,

다른 꽃들이 더 이상 피지 않을 때 능소화는 붉고 큰 꽃망울을 터뜨려 당신을 기다릴 것입니다.

큰 나무와 작은 나무, 산짐승과 들짐승이 당신 눈을 가리더라도

금방 눈에 띌 큰 꽃을 피울 것입니다.

꽃 귀한 여름날 그 크고 붉은 꽃을 보시거든 저인 줄 알고 달려와주세요.

저는 붉고 큰 꽃이 되어 당신을 기다릴 것입니다.

 

처음 당신이 우리집 담 너머에 핀 소화를 보고 저를 알아보셨듯,

이제 제 무덤에 핀 능소화를 보고 저인 줄 알아주세요.

우리는 만났고 헤어지지 않았습니다..

 

곡기를 끊었습니다. 사흘 동안은 물을 마셨지만 이제 물마저 끊었습니다.

이렇게 곡기와 물기를 끊어 저는 당신과 아이가 있는 곁으로갈 작정입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났을 땐 눈앞이 흐릿햇습니다.

이제 저는 낯익지만 모진 세월과 작별하고 정다운 사람들 곁으로 갑니다.

--능소화를 심으며 중에서.

 

 

스스로 곡기를 끊어 자살을 암시하는 서한을 마지막으로 그 이후의 글은 없다고 한다.

아들 원이는 어린나이에 병으로 죽었고 아우인 승희는

고성이씨 족보에 응태의 아들로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작가는 이글을 보고 이응태의 무덤에 능소화가 있을까

싶은 생각에  발굴 당시 특별히 붉은 꽃을 본 기억은 없고

경상북도 문화재 관리과에서 작성한 발굴 당시 기록을 살폈다고 한다.

 

'덩굴나무와 잡목, 잡초로 둘러싸인 낮은 봉분....'

덩굴나무,, 덩굴나무,, 능소화는 칠월과 팔월에 피는 꽃이고,

발굴된 때는 사월이었으니 사람들이

덩굴나무만 발견했을 뿐일 것이다.

 

이후 작가는 능소화가 피는 여름에 여늬의 무덤도 찾아 나선다.

영양군 입암면 일대를 인부를 동원 찾는 작업을 벌였고

어느곳에도 없는 능소화가 성벽처럼 두르고 앉은 무덤을 찾게되고

작가는 그것이 여늬의 무덤임을 확신하고 파 보지만

검은 흙 몇줌외에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여늬가 남긴 글들은 후세에 남기고 싶어서 쓴 글은 아닌것 같다고 한다.

날짜나 부모등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만 봐도 일기 형식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서한이 안동에서 발견될 수 있었던 건 친정에서 죽은 후

서한을 아들인 안동의 승회에게 전해진 것으로 본다고 한다.

 

 

 

 

이 소설은 인간 존재에 관한 질문으로 읽어보는 것도 좋겟다.

여늬와 대결하는 팔목수라는 인간의 본능과 원초적 악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갇혀 있지만 밖으로 뛰쳐나오려고 하는 인간의 무의식적 죄악감. 적개심. 공격본능..

그러니까 팔목수라는 여늬 마음속에 있는 나쁜 표상이 외부로 투사된 투사체이며

여늬와 팔목수라는 동일인인 셈이다.

 

팔목수라가 긴 세월 동안 여늬가 가는 곳 어디나 나타나는 것은

결국 그 자신이 여늬의 또 다른 자아이기 때문이다.

여늬가 만난 적도, 기억하는 것도 없지만'낯설지 않은 팔목수라의 체취'에

놀라는 것 또한 두 존재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저자 후기 중에서

 

 

 

  제작년에 찍은 능소화사진이 생각나서

사진 파일을 다 뒤져서 찾아낸 능소화 꽃이다.ㅎㅎ

칠 팔월 무렵이면 구미고 담장에는 두어달 내내 능소화가 피고 진다.

 

담장 같은 높은 곳에 넝쿨로 올라가 피는 꽃인데

그 붉은 빛이 지나는 행인들의 눈길을 사로 잡을 만큼 매혹적인 꽃이다.

작은 아이 고 3시절이고 워낙 더웠던 때라 자주 마중나갔었고,

어느날 그 꽃색에 혹해서

카메라를 들고가 한참을 올려다 보면 찍은 기억이 난다.

 

원래 소화꽃인 것을 여늬가 '하늘도 능히 이긴다'고

능소화로 붙이겠다던 여늬의 염원이 담긴 꽃인지는 모르지만

참 고고하고 아름답게 피는 꽃임은 틀림없다.

 

 

양반꽃이라고 이름 붙여진 꽃

높은 곳에 있어서 우르러 봐야 해서,

양반집에서만 심었다는, 상놈집에 이 꽃을 심으면

양반에게 혼났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꽃이 없는데

여늬의 운명인지 하늘이 정해준 사랑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염원이 담긴 꽃이어서

올해부터는 이 꽃을 보게 된다면 

작년과는 다른 느낌일 것 같다.

 

또 하나 원이 엄마를 통해서 기록물의 위대함을 보게된다.

한 여인의 애틋한 사랑이 세기를 거슬러 이렇게 감동을 줄수 있는 것은

 기록이 없었다면 어찌 전해졌을까.  

좋은 느낌 좋은 마음을 기록으로 남겨두는 일이

내 역사가 되기도 하고 거창하게는 인류의 역사가 될지도 모른다.

100권의 고전을 읽기보다 졸작이더라도 한번 써보는 작업이

훨씬 가치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