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만에 또 창작집을 내면서 또 작가의 말을 쓰려니 할 말이 궁했던지
문득 이게 마지막 창작집이 될 것 같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곧 피식 웃음이 나면서 그런 객쩍은 짓을 안하게 된 것은
아마 돌아가신 시어머니 생각이 나서였을 것이다.
그분은 연세가 일흔을 넘고 나서부터는 해마다 생신 때만 돌아오면
올해가 마지막 생일이 될 것 같다고 비장한 어조로 말씀하시곤 했다.
그 마지막 생일은 그 후에도 십 수차레나
더 계속되어 최초의 예언적 비장미를 잃었다.
왜 그랬을까?
그분은.
생신을 잘 차려달라는 엄포였을까.
아니면 반복되는 연중행사에 진력이 나서였을까.
나도 사는 일에 어지간히 진력이 난 것 같다.
그러나 이 짓이라도 안 하면 이 지루한 일상을 어찌 견디랴.
웃을 일이 없어서 내가 나를 웃기려고 쓴 것들이 대부분이다.
나를 위로해준 것들이 독자들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활기 넘치는 표지화를 허락해준 김점선 화백과
책 한 권 분량이 되도록 기다려주고 채근해준 문학과지성사에 감사드린다.
아차산 기슭에서 길고 지루한 여름을 보내고 나서
--박완서. 작가의 말.....
영영 우리곁을 떠나신 박완서선생님 생각에 이 아침에 펴든 책이다.
책 표지 그림의 김점선 화백도 제작년에 떠났고, 장영희 교수도 떠나셨다.
김점선 선생님 그림이 먼저 정겹다.
아차산 자락 박완서선생님댁에 수시로 친정오듯이 놀러왔었다는 김전선화가.
하기사 원래 그녀의 친정집이었고 박완서선생님 노년의
거처가 된 곳이라는 얘기를 들은적이 있다.
산을 넘어 몇시간이나 걸어와서는 신발 벗기싫어서 현관앞 의자에
한참을 앉았다가 그렇게 돌아가셨다는 일화를 '점선젼'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 자유분방한 그녀의 흔적도 그림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는듯 하다.
어디를 저리 부지런히 열심히 향하고 계실까.ㅎㅎ 활기가 넘친다.
박완서 선생님 댁으로 향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일까!
이 책은 2007년에 나왔으며 이후에 나온 책들도 몇권 더 있다.
'친절한 복희씨'는 단편소설이 9편이 묶여있으며
이 책을 읽을 당시도 그랬고, 오늘 다시 읽어도 그렇고,
노인문학의 정수를 제대로 훌터내는 분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감각은 둔해지고 무디어질지언정
정신의 서슬은 더욱 예민하게 시퍼렇게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노인세대의 정서가 이 책속에는 다양한 형태로 실려 있다.
누구에게나 닥칠 노년의 삶,
젊은이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 나이든 분들을 위한 책이라고 해야 할까.
그만큼 연륜을 가진 작가도 많지 않을뿐더러,
누구나 닥칠 문제지만 짚어서 이런 글을 쓴 작가는 극히 드물다.
그만큼 젊은 작가들에겐 가보지 않은 길이어서 외면하기 좋은 주제 일 수도 있다.
신경숙작가의 '엄마가 필요해' 같은 노인문학의 향취를 느낄수 있다.
나만 그런줄 알았는데. 어제 친구와 통화중 친구도
선생님 글은 소설도 소설같지 않다고 해서 반가웠었다.
그만큼 진정성 있는 글을 써오신 선생님 글의 힘이고,
소설인지 산문인지의 개념도 잊을만큼 독자들이
당신작품 속을 빠져들도록 매력적인 글을 쓰신 분이시다.
어느 작가보다도..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공감갔던 '촛불 밝힌 식탁'이라는 단편을 올려봅니다.
고인의 냉철한 지성과, 거침없는 필력이 맘껏 드러난 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도 공감갔지만 몇살 더 먹어 그런지 더욱 공감갑니다.
단편이라 양이 적어서 도입부 세 페이지 정도 제외하고 다 실어봅니다.
도입부는 시골에서 교장으로 정년 퇴직한 주인공 나(남자)가
아들이 있는 서울로 와 살게 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인데
시내에 나왔다가 마누라가 좋아할 만한 선물이 뭐 없을까
기웃거리다 팬시점 같은 곳이 밀집한 곳에서
양초만 전문적으로 파는 가게를 보게 되고 들어가 양초를 사는 풍경입니다.
한 단어 한 문장 한단원도 행간까지 버릴것이 없는
박완서 선생님의 진수를 보여주는 글들입니다.
즐감하시길..
소녀들이 지저귀듯이 명랑하게 떠들며 몰려 들어왔다.
통로는 소녀들을 비집고 나가기도 불편한 너비였다.
나는 얼른 아까부터 눈여겨보던. 소년 소녀의 머리 꼭대기에 심지가 나와 있지 않으면
그냥 귀여운 인형처럼 보이는 양초를 한 쌍 샀다.
오늘은 집 안의 전깃불을 다 끄고 이 촛불만 밝히고 우리 둘이서
오붓하게 저녁을 먹자고 하면 마누라는 알아들을까.
알아듣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받아들이는 일일 것이다.
우리부부가 낯선 서울로 이사 온 것은 오랫동안 떨어져 살던 아들 내외와 가까이 살고 싶어서였다.
마누라의 영악한 재테크덕에 아들을 결혼시킬 때 자그마한 아파트도 한 채 장만해주었겠다.
우리가 여생을 서울에서 보낼 뜻을 비치면 으레 같이 합치 잘 줄 알았다.
아들이 얼마 정도의 아파트를 원하느냐고 부동산 업자처럼 사무적으로 물어보길래
"너희들 아파트를 팔아 보태면 비싼 동네의 평수 넓은 아파트도 살 수 있을 만큼 가지고 있단다.
돈 안쓰는 재주하고, 모인 돈은 누가 집어 갈까 봐 얼른 땅하고 바꾸는 재주밖에 없는 너희 엄마 덕이고,
그동안 시골 땅값이 엄청 오른 덕이긴 하지만 내가 평생을 바쳐 일군 귀한 재산이기도 하니
너희들하고 같이 누리고 싶구나."
내 생각으로 결코 지나친 욕심을 부린 것 같지 않은데 며늘애가 눈을 똑바로 뜨고 말했다.
"아버님, 저희들이 맞벌이 하면서 연년생으로 아이 둘 키우며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아세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어요. 친정엄마가 파출부처럼 드나드시지 않았으면
우리 둘 중의 하나가 직장 그만둬야 했을 걸요.
솔직히 저이 직장보다 제 직장이 도중에 그만두기 아까운 직장이란 건 아버님이 더 잘 아실 거예요.
그렇게 눈물나게 아이들 키워 이제 돈 들 일만 남았지
잔손 갈일은 없어져서 숨 돌리게 되니까 같이 사시자고요?"
며느리는 우리 부부를 마치 이런 염치없는 늙은이들이 있나 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말이 난김에 말인데 며느리는 중학교 사회 선생이다.
나는 무안하고도 참담해서 마른 입술을 축여가며 겨우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며느리 시집살이할 생각 추호도 없다.
그래도 손주가 뭔지 그것들 드나드는 것도 보고 말벗도 됐으면 늘그막에
한결 덜 적막할 듯 싶어 한번 해본 소리였으니 마음에 두지 말거라."
아들이 위로한답시고 한술 더 떴다.
"아버지 그건 손자가 예뻐서가 아닐 거예요.
아이들하고 정들새가 없으셨잖아요. 직업병일 거예요.
평생 아이들하고 같이 사셨으니까 아이들이 빠진 생활을 상상을 못 하시는 거죠."
이런 쓸개 빠진 머저리 새끼 같으니라구.
그래도 며느리가 한결 다부진 데가 있었다.
"아버님, 이왕 이렇게까지 말이 나온 김에 제가 어려운 부탁하나 드릴께요.
아버님은 쭉 지방에만 사셔서 잘 모르시겠지만 지금 우리 사는 아파트가 얼마나 후진 아파트라고요.
처음에 사 주실 때 조금만 안목을 높여 사주셧더라면 투자가치도 있었을 텐데. 영 아니거든요.
우리 동네처럼 안 오르는 동넨 처음 봤어요. 왠 줄 아세요.
학군이 안 좋고 학원도 좋은 학원이 없기 때문이에요.
말벌이까지 하는우리가 어떡하든지 우리 힘으로 그놈의 동네를 면해야 하는 건데
과외공부비 때문에 돈을 모으다는 건 엄두도 못 낸다니까요.
아버님은 이제 가르칠 아이도 없는데도 좋은 동네에서 사시고 싶으신가 본데 저희들은 오죽하겠어요.
그러니까 좋은 동네에서 합쳐 살 돈을 쪼개서 좋은 동네에
아파트를 두 채 장만하도록 하는 게 어떻겠어요.
물론 지금 사는 저희 아파트는 처분해서 보태야조. 보태고 말고요."
이렇게 해서 며느리가 봐놓은 학군 좋은 아파트 단지에 아파트 두 채 사게 되었다.
우리는 늙은이가 살 거니까 작은 걸로 아들네는 네 식구가 살 거니까 사십평이 넘는 걸로했다.
일이 그렇게 가닥을 잡자 일사천리로 진행이 잘 되었다.
같은 단지라 해도 대단지라 얼마든지 떨어져서 장만할 수도 있었고
며느리는 그러고 싶은 눈치가 역력한데.
우리도 배알이라는 게 있는 늙은이 이고 또 칼자루를 쥐고 있다는 배짱 때문에
앞 베란다에서 뒤 베란다를 바랄볼 수 있는 앞뒤 동으로 정할 수가 있었다.
마누라는 그런 소리를 어디서 들었는지 수프가 식지 않을 거리가
따로 사는 부모 자식 간의 이상적인 거리라고 좋아했다.
나는 마누라에게 그런 소리는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윽박질었다.
왜냐하면 며느리가 가끔가끔이라도 따뜻한 음식을 해 날라야 될 것 같은
부담을 느끼기 알맞은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나는 불빛을 확인할 수 있는 거리라는 말을 썼다.
"나도 폐 될까 봐 지척에 살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늙은이 일은 모르는 일.
더군다나 우리 두 늙은이 중 하나가 죽으면 너희가 부담을 안 느낄래야 안 느낄 수 없게 될 터.
매일 문안은 못할지언정 불빛으로라도 오늘도 저 늙은이들이 살아 있구나
확인하고픈 게 자식 된 도리가 아니겠냐. 우리도 너희 집 창문에 불이 켜지면
내 새끼들이 오늘도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편안한 잠자리에 들 거 아니냐.
서로 불빛을 확인할 수 있는 거리에 산다는 것.
바쁜 자식과 할 일 없는 늙은이끼리 이보다 더 좋은 소통의 방법이 없을것 같구나."
약간의 비양거림도 섞인 말을 손톱도 안 들어가가
야물딱지기만 한 며느리가 그냥 들어넘길 리가 없었다.
"앞으로 남자 평균연령도 아흔다섯까지 된다고 하는데 벌써 그런 말씀 하시는 거 아니죠."
사뭇 훈계조다. 이런 자세한 속사정까지 알 리 없는 고교 동창들은
내가 아들네하고 불빛을 확인 할 수 있는 거리에 살게 됐다는 소리만 듣고도
게걸스러울 정도로 부러워했다.
자식이 그정도로만 부모하고 가까이 살자고 해도 효자라는 거였다.
효자 아들 뒀다고 부러워하는 소리가 그냥 해보는 위로의 말이 아니라
정말 부러워한다는 걸 안 나는 남의 이목이 뭔지 얼떨결에
모범적인 노후 설계를 한 것처럼 자족하게 되었다. 으쓱하기까지 했다.
며느리도 가깝게 지내보니 결코 이악하기만 한 아이가 아니었다.
부모한테도 신세를 지거나 걱정을 끼지는 걸 극도로 싫어해서 좀 정이 없어 보일 뿐
경우 하나는 똑떨어지게 밝은 아이였다. 한 달에 한두 번은 꼭꼭 우리 부부를 초대해서
손자들과 함게 저녁식사를 같이하도록 했다.
그런 얘기를 동창회에서 하면 그 당연해 보이는 일까지 샘들을 내곤 했다..
과외공부에 바쁜 애들을 조부모와 같은 식탁에 앉힌다는 게.
그것도 정기적으로 그건 보기 드문 효도라는 거였다.
들을수록 해괴한 소리뿐이었다.
아무리 촌구석에 있었다고는 하나 화전을 일구다 온 것도 아니고.
지리산 골짜기에서 서당선생을 하도 온것도 아니고 현존하는 이 세상에 나가
사람 노릇을 하는데 지장이 없을만큼의 기본적인 인성교육을 시키는 곳의 장으로 잇다 온 사람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을 만큼 어떻게 이렇게 고약하게 이 세상이 변했단 말인가.
그나마 내 자식이 그 고약한 세상에서 첨단을 가게 변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그것도 다 도시 친구들과 어울릴 기회가 자주 있으니까 깨닫게 된 거였다.
그러나 남이 부러워하고 좋아고 하니까 나도 좋은 줄 안 건 오래가지 않았다.
사람의 오관 중 가장 정직한 입맛이 먼저 입바른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아들네 집에 처음 초대받을 때만 해도 아들네 식탁의 깜끔하고 장식적이고
국적 불명의 퓨전 요리를 신기해서 하나하나 맛보면서
그 요리법까지 묻던 마누라가 차츰 시들해지더니 나중에는 집에 와서
김치 국물로 입가심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고 손자들이야 그 맛밖에 모르고 자랐으니까 할 수 없다손 쳐도
내 새끼 불쌍해서 어쩌나 탄식을 하곤 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청국장을 맛있게 끓인 날 아들네 집에 그걸 갖다 주고 왔다.
아들이 희색이 만면해서 그걸 반기더란 얘기를 자랑스럽게 하면서 앞으로는 종종 그럴 거라고 했다.
거기 재미를 들인 마누라는 아들이 좋아하던 음식들 하나하나 생각해내서 나르는 빈도가 점점 잦아졌다.
아들이 눌은밥을 못 얻어먹고 살다니, 하면서 새로 돌솥을 사다가
일부러 눌은밤을 만들어서 갇다 주고 오기까지 했다.
나는 아들네로 음식 해 나르는 재미로 새록새록 살맛이 나 보이는 아내가 측은하고도 불안해
여보. 넘치는 건 모자라는 건만 못하다우. 하고 넌지시 귀띔을 하곤 했다.
그러지 않았으면 아마 매일 그 짓을 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가끔 허탕을 치고 올 적도 있었다. 온 식구가 외식을 하는지 집이 비어 있더라고 햇다.
정성을 다해 솜씨 부린 별식을 못 먹이고 온 마누라는 어깨가 축처지고 황량해 보였다.
나는 그런 마누라가 보기 싫어 큰 소리로 화를 냈다.
"그냥 무턱대고 가면 어떡해? 우리가 왜 앞뒷집에 사는데.
아들네 집 창에 불이 안 들어오면 그건 아직 아무도 집에 안 들어왔다는 표시 아닌감."
"참 그렇군요. 그걸 왜 몰랐을까."
마누라가 다시는 허탕 치는 일이 없도록 마누라가 아들을 위한 별식을 만드는 동안
나는 베란다에 나가 아들네 집 창문의 불빛을 살피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나도 아내 못지않게 조바심이 나서였다.
무심히 볼 때는 몰랐는데 지켜보고부터는 창에 불이 안들어는 날이 점점 잡아지는 것 같았고,
그건 신기할 정도로 마누라가 별식 만드는 날과 일치하곤 했다.
아들이나 며느리가 정기적으로 우리한데 전화를 걸기 때문에 그 기회에 슬쩍
요새 너희 식구들이 늦게 들오는 거 같더라고 했더니,
아이들은 과외때문에 들어오는 시간이 워낙 들쭉날쭉하고,
저희들은 피곤하면 집에 가 밥해 먹기 귀찮아 서로 약속해서 밖에서 먹고 들어가는 날이 많다고 했다.
그 말투의 데면데면함이 감시다히가 싫다는 의사 표시 같아서
나는 그럴 때는 우리한데 와서 먹고 가지 그러냐고 하고 싶은 걸 꾹참았다.
아무리 부보 자식 간에도 감시하는 마음으로 지켜본다는 건 안 좋은 일이었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아들네의 불 꺼진 창이 딴집의 불 꺼진 창하고는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칠흙이 아니라 모닥불의 잔광 같은 불확실한 밝음이 깊은 데서 일렁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왔다
퓨전 음식을 더욱 분위기 있게 만드는 아름다운 양초가 켜진 식탁이 떠올랐다.
그 식탁에 손자들도 함께 하고 있는지는 그닥 중요하지 않았다.
그건 사실이 아니라 망상일 수도 있었다. 망령 부리기에 이른 나이도 아니니까.
그렇다고 일찍 망령 나는 게 자랑일 수는 없지 않은가.
망상으로부터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누라가 입맛으로 아들을 붙잡아 둘 수 있다는 망집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하듯이
모닥불의 잔광 같은 희미한 빛을 보았다기 보다는 느낀 어느날 저녁
그날은 마누라가 아들을 위한 별식 같은 걸 한 날도 아닌데
나는 슬쩍 산책 나가는 척 혼자 나가 맞은편 아들네 아파트로 올라가 초인종을 눌렀다.
연거푸 두번 세번 눌러보았다.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지만 나는 느낌으로 안에서 웅성대는 인기척과
현관문에 달린 동그란 렌즈가 비정한 외눈으로 변하는 걸 알았다.
확인된 바 없는 느낌은 마누라에게 함부로 말하는게 아니다.
그쯤 해서 조용히 물러나려고 엘리베이터에 올라 일층을 누르는데
마침 아들네 앞집 907호에서 아기를 안은 여자가 톡 튀어 나와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었다.
여자가 붙임성 있게 미소짓길래 나도 답례로 무슨 말인든지 해야 될 것 같아.
908호 아직 아무도 안 들어왔나 보죠? 하고 내가 할 일이 없어 엘리베이터나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는
실없는 늙은이가 아니라 당당하게 908호에 볼일이 있어서 왔다 간다는 표시를 했다.
"앞집 선생님이요? 들어오셨는데. 방금 전에 저희 집으로 파 한뿌리 얻으러 오신걸요,."
마누라도 알건 알아야 한다.
하나 나처럼 충격적으로 알게 하고 싶진 않다.
우리도 젊은이들처럼 무드 한번 잡아봅시다.
이러면서 온 집안의 전깃불을 다 끄고소년 소녀가 마주 보고 생긋 웃는 형상의
아름다운 한 쌍의 양초로 식탁을 장식한다면 알아들을까.
마누라에게는 알아듣는 것보다 받아들이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이 두 개의 양초밖에 안 들었다기에는 너무도 무겁게 처져 보였다.
--촛불 밝힌 식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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