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수필

사랑은 나의 약점

구름뜰 2012. 10. 27. 09:55

   

 

  당신은 내게 어느 동성애 운동가의 시를 읽어 준다.

  강렬하고 아름답고 신비로운 시를.

  내 언어가 결코 가 닿지 못한 슬픔의 세계가

  밤하늘의 성좌처럼 선명하게 펼쳐진 시를.

  나는 고통스럽다.

  반은 질투심에, 반은 감화되어.

  그러나 나는 다만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다. 참으로 오랜만에

  진실된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한 명의 유순한 독자가 되어.

 

  시를 읽고 난 후 당신은 나에게 웃으며 말한다.

  당신이 동성애자였다면

  이렇게 좋은 시를 쓸 수 있었을 텐데.

  나를 사랑하는 것, 그것이 당신의 유일한 약점이군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당신의 위트 섞인 선의 아래에는

  아주 날카로운 메시지가 숨어 있다.

  내가 중산층 이성애자 시인이라는 사실.

  그것은 유일한 약점이 아니라

  나의 본질적인 한계가 아닌가?

 

 

 

 

 

  나는 오늘 두 통의 전화를 받았다.

  한 사람은 말했다.

  축하합니다. 당신의 시가 '올해의 좋은 시'로 뽑혔습니다.

  내일까지 수상소감을 보내주세요.

  다른 사람은 말했다.

  아쉽지만 당신의 시는 대중 집회 장소에서 읽기는 다소 어렵군요.

  내일까지 소통이 좀 더 용이한 시를 보내 주시겠어요?

  두 사람은 같은 시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었다.

  나는 두 사람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다. 내일까지

  아주 문학적인 수상소감문 하나와

  아주 대중적인 시 한 편을 보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들이 기대하는 성실한 시인이자 선량한 시민이니까.

 

 

 

그런데 당신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 시에서 나는 당신에게 청혼을 했다.

  내가 한 줄기 따스한 입김을 후우, 당신의 귀에 불어넣자

  당신은 활짝 웃으며 좋아요! 하고 수락했다.

  나는 언젠가 당신에게

  지극히 평범하고 직설적인 말로

  말하자면 전혀 시적이지 않은

  기껏해야 두 문장 정도로 이루어진 말로 청혼을 할 생각이다.

  나는 안다. 전혀 시적이지 않은 그 두 문장이

  내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지을 것이다.

 

 

  또 하나 당신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당신이 시를 읽는 동안 나는 우연히

  창밖으로 한 노인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쪽동백나무 아래로 아주 천천히 걸어가면서

  질질 끄는 기괴한 발걸음으로

  떨어진 꽃잎들이 아름답게 수놓은 길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그 노인과 나는 눈이 마주쳤다.

  아니다. 사실 마주치지 않았다.

  그 노인은 내게 하나의 이미지였다.

  내가 대변할 수 없는 세계로부터 던져진 잿빛 가죽 포대였다.

  그 노인이 나와 눈이 마주쳤더라면

  단 1초만 마주쳤더라면 나는 이렇게 썼을 텐데.

 

 

  그는 내게 말하는 듯했다.

  시인이여, 노래해 달라.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나의 머지않은 죽음이 아니라

  누구도 모르는 나의 일생에 대해.

  나의 슬픔 사랑과 아픈 좌절에 대해.

  그러나 내가 희망을 버리지 않았음에 대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생존하여 바로 오늘

  쪽동백나무 아래에서 당신과 우연히 눈이 마주쳤음에 대해.

  나는 너무 많은 기억들을 어깨 위에 짊어지고 있는데

  어찌하여 그 안에는 단 하나의 선율도 흐르지 않는가.

  창가에 서 있는 시인이여.

  나에 대해 노래해 달라. 나의 지친 그림자가

  다른 그림자들에게는 없는 독특한 강점을 지녔노라고 제발 노래해 달라.

 

 

 

 

  당신이 시를 다 읽고 났을 때 노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당신에게 웃으며 말한다.

  정말 좋은 시군요.

  질투심을 느낄 정도로 당신이 이야기한

  나의 유일한 약점,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네요.

  그런데 내 사랑, 오늘은 내가 할 일이 너무 많군요.

  내일까지 당장 두 편의 글을 마감해야 해요!

-심보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