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다니는 길을 다니고
부자들보다 더 많이 돈을 생각하고 있어요
살아 있는데 살아 있지 않아요
헌옷을 입고
몸만 끌고 다닙니다
화를 내며 생을 소모하고 있답니다
몇 가지 물건을 갖추기 위해
실은 많은 것을 빼앗기고 있어요
충혈된 눈알로
터무니없이 좌우를 살피며
가도 가도 아는 길을 가고 있어요
문정희 (1947~ )
돈이 신(神)이 되고 물건이 주인이 된 곳에서는 누구나 사는 모습이 비슷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벌면서 빼앗기고, 소비하면서 소모된다. 욕망 일색인 “아는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를 맴돌 뿐이라는 점에서 진정 ‘모르는 길’이다. 우리는 오아시스를 지척에 두고도 핏발 선 눈으로 먼 곳의 신기루를 좇는 어리석은 방랑자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사는 건 사는 게 아니라고 시는 말하지만, 사막의 “아는 길”을 버리고 달리 다른 길을 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른 삶의 씨앗은 이 삶 속에 있다. 너무 깊어져 고질이 된 메마름을 힘써 견디는, 고행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행간에 배어난다. - 이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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