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기

래여애반다라 /이성복

구름뜰 2013. 2. 13. 20:12

 

 

 

 

 

시에 대한 각서

 

고독은 명절 다음 날의 적요한 햇빛, 부서진 연탄재와 탱자나무 가시, 고독은 녹슬어 헛도는 나사못. 거미줄에 남은 나방의 날개. 아파트 담장 아래 천천히 바람 빠지는 테니스 공, 고독은 깊이와 넓이. 크기와 무게가 없지만 크기와 무게. 깊이와 넓이 지닌 것들 바로 곁에 있다 종이 위에 한 손을 올려놓고 연필로 그리면 남는 공간. 손과 파과 이어져 잇기에. 그림은 닫히지 않는다 고독이 흘러드는 것도 그런 곳이다.

 

 

 

 

시창작연습 1

 

우리 집 방바닥은

너무 높거나 너무 낮다

너무 높을 때는 아내가 엄마 대신

나를 몹시 때릴 것 같고,

너무 낮을 때는 봄 대신 가을이 쳐들어와

내 기쁨 패대개칠 것 같다.

나는 우리 집 방바닥이 계단처럼

여러 칸이었으면 좋겠다

첫번째 계단에서 결혼하기 전

알던 여자를 눞히고

그 바로 위 계단에는그녀가

낳아보지 못한 내 아이를 누이고 싶다

눕기 싫다고 아이가 앙탈하면

내가 대신 기저귀 차고 드러눕고 싶다

아니면, 피로에 지친 암캐미처럼

나 혼자라도 알 까고 싶다

그리고 문득 눈 감으면

그 모든 계단들이 부채살처럼 접혀

아무도 내 생각 들여다보지 말았으면 좋겠다

 

 

 

 

뚝지

 

 1

울진 앞바다 깊은 바위틈에 바보 물고기 뚝지가 산다 눈도 입도 멍청하게 생긴 수컷이 저만큼 멍청한 암컷의 배를 만지고 쓰다듬고 자꾸 눌러서 희부연 알덩어리가 뭉게뭉게 쏟아지면, 그 위에 수컷은 밀린 오줌 싸듯이 정액을 쏟아 붇는다 엉겹결에 수정이 끝나면 막무가내로 수컷은 암컷을 밀어내고 제 혼자 배를 까뒤집고 끈끈이 주걱 같은 지느러미로 흐느적흐느적 산소를 불어 넣어준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고 온몸이 쭈그러들어, 쭈그러진 살갗 빼곡히 꼼지락거리는 기생충이 피를 빨아도 떼어낼 생각도 않고, 삼십 일이나 사십 일 단장의 세월이 끝나고 올챙이 꼬리 같은 새끼들이 어리광 부리며 헤엄쳐 나오면 그제야 수컷은 깊은 숨 한번 들이킬 여가도 없이 숨을 거둔다 물론 그 전에라도 배 출출한 무적의 무법자 대왕문어가 수시로 찾아와 육아에 바쁜 수컷을 끌어안고 가는 것이다.

 

2

때로 수컷 뚝지가 쫒아내도, 쫒아내도 떠나지 않는 암컷 뚝지를 기어코 밀어내는데. 그것이 왜 그렇게 안떠나려고 버둥거렸는지는, 혼자서 풀이 죽어 떠나가다가 느닷없이 나타난 대왕문어의 밥이된 다음에야 알 수 있다. 갈가리 찢긴 암컷의 아랫도리엔 미처 다 쏟아내지 못한 알들이 무더기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바보야, 그러면 그렇다고 말이라도 할 거지. 바보야

 

3

또 어느 때는 수컷 뚝지가 눈 껌뻑거리며 쉬임 없이 지느러미 놀려 가지런한 알들에게 산소를 불어넣어 줄 때, 제 짝을 못 구한 암컷 뚝지가 두리번거리며 찾아와 연애 한번 하자고, 한 번만 하자고 졸라대지만, 수컷은 관심이 없다. 아예 쳐다도 보지 않는 수컷은 막무가내로 암컷을 밀어내지만, 그것이 왜 그토록 집요하게 치근덕거렸던가는 그 또한 대왕문어의 밥이 되어 뱃가죽 터지고 사지가 너덜거려야 알 수 있다. 아무도 아무도 애무해주지 않아 쏟아보지도 못한 알들이 무더기무더기 깊은 바다에 떠다니고 있었다.

 

4

뚝지만 잡아먹다가도 영 입맛이 없고 괜시리 성질 더러워지는 날에는 대왕문어 두 마리가 서로를 잡아 먹으려고 덤비다가 두 마리 모두 시체가 되어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다 죽음이 죽음을 잡아먹으려다 죽어버린 것이다.

 

 

 

 

 

 

 

나무에 대하여

 

때로 나무들은 아래로 내려가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나무의 몸통뿐만 아니라 가지도 잎새도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고 싶을 것이다 무슨 부끄러운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왼종일 마냥 서 있는 것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을 것이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제 뿌리가 엉켜 있는 곳이 얼마나 어두운지 알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몸통과 가지와 잎새로 고스란히 제 뿌리밑에 묻어두고, 언젠가 두고온 하늘 아래 다시 서 보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이성복 교수님의 십년 만에 나온 신간이다. 지인이 슬하에서 배우고 있는 터라 고맙게도 직접 사인을 받아왔다. (지인 왈, 요 아래쪽 한자로 '래여애반다라'로 써주신 것이 애정표시라고, , ㅎㅎㅎ) 

 

 보다 쉬다 보다 쉬다 로 일주일을 보냈다. 그럴 줄 알았지만 역시나 어렵다.  한 참 더 지나고 나면 지금 보다 더 잘 읽힐 것을 믿는다. 책나오기 전 '시에 대한 각서'나 '시창작연습1'은 발표될 때  좋아했던 시라서 익숙하고 그외 '뚝지'가 좋아서 전문을 다 올려봤다. 

 

 동물은 종족번식을 위해서만 구애한다. '뚝지'는 생명을 걸고 본능에 충실하는 구애이야기다. 나무도 위기감을 느끼면 달라진다. 소나무도 솔방울을 만들어 내고, 평소엔 멀쩡하던 벤자민 나무도 열매를 맺고 고무마줄기도 꽃을 피운다. '에로티즘'은 인간만이 가진 것이다. 어느 학자는 금기가 에로티즘을 유발한다고도 했다.

 

* 래애반다라의 이두문자를 의역하면, 

來  - 이곳에 와서

如  - 같아지려 하다가

哀 - 슬픔을 맛보고

反 - 맞서 대들다가

多 - 많은 일을 격고

羅 -비단처럼 펼쳐지다

라는 뜻으로 풍요(공덕가)일종의 노동요(공동의로 일하면서 부르는)의 노랫말 이라고 한다. 노동하면서 노래를 하면 박자를 맞추기 때문에 일에 능률이 오르니 지혜로운 발상이다. 노는 사람과 일하는 사람 구분없이 노래를 함께 한다는 것은 함께 일한다는 뜻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 노랫말은 그 어떤 것들보다 구성지고, 외설 해학, 삶의 애환등이 녹아있었다고 한다.

 

노동요 노랫말은 재밌다. 시집못간 노처녀의 신세타령 부터 과부 홀아비의 신세, 그리고 며느리의 시집살이 애환 특히나 시어머니 시누이에 대한 이야기 등이 들어있어서 반복해서 부르는 동안 일에대한 고단함도 잊고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해소하는 일거양득의 효과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책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늘과 땅 - 산도르 마라이  (0) 2013.03.10
단한번의 연애 /성석제  (0) 2013.03.04
외면일기/미셀 트루니에 산문집   (0) 2013.01.31
소단적치인/연암  (0) 2012.12.17
마징가 계보학 /권혁웅   (0) 2012.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