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기

소단적치인/연암

구름뜰 2012. 12. 17. 09:54

한 달이 어떻게 지나갔나 모르게 흘렀고

오늘은 느긋이 여유를 즐기는 아침입니다.

아침 신문을 보다가 시기가 시기인지라 말 많고 글 많은 세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래전, 18세기 왕으로선 처음으로 반정을 일으킨 사건이 있었지요.

정조가 일으킨 문체반정인데 왕이 연암을 두고 일으킨 반정이었는데요

그 연암의 글이 생각나서 자료를 찾아서 몇자 올려봅니다.

한문이라 워낙 주석 많고 글자야 읽지만 그 뜻을 모르고 읽히는 게 많아서 

아예 한문은 제외하고 올려봅니다.

 

이 무슨 고문!!(옛글로 읽힌다면 좀 덜할 것 같고,

고문으로 읽힌다면 진짜 고문일수도 있겠습니다. ㅎㅎㅎ

 하지 마시고 재밌으니 읽어 보세요.

한 다섯번 열 번 정도 읽으면 훤씬 더 잘 와 닿습니다.ㅎㅎ

 

 

글을 잘 짓는 자는 병법도 잘 알 것이다. 글자는 비유 하자면 군사요. 글 뜻은 장수요, 제목은 적국(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항복받아야 하는 대상이므로) 이요. 고사의 인용은 전장의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요. 글자를 묶어서 구를 만들고 구를 모아서 장을 이루는 것은 대오를 이루어 행군하는 것과 같다. 운을 맞추어 읊고 멋진 표현으로써 빛을 내는 것은 징과 북을 울리고 깃발을 휘날리는 것과 같으며. 앞뒤의 조응은 봉화이고, 비유는 기습 공격하는 기병이며, 억양반복은 맞붙어 싸워 서로 죽이는 것이고, 파제(당, 송 시대에 과거 답안지의 첫머리에 시제의 의미를 먼저 설파하는 것을 말한다. 명, 청 시대 팔고문에 이르러 고정된 법식이었다고 한다.) 한 다음 마무리하는 것은 먼저 성벽에 올라가 적을 사로잡는 것이며, 함축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고, 여운을 남기는 것은 군대를 정돈하여 개선하는 것이다.

 

 

 

* 원래 소단은 문단이란 뜻으로 여기서는 문예를 겨루는 과거시험장을 가리킨다.

적치는 한나라의 한신이 조나라와 싸울 때 계락을 써서 조나라 성의 깃발을 뽑고

거기에 한나라를 상징하는 붉은 깃발을 세우게 하여 적의 사기를 꺽어

승리한 고사에서 나온 말로, 전법이나 영수의 비유로 쓰인다. 요건대 <소단적치>란

과거에서 승이를 거둔 명문장을 모은 책이란 뜻이다.

 

이글은 연암의 처남인 이재성이 고금의 과제를 모은 <소단적치>에 써준 서문이다.

그래서 인이 붙었다. 과거시험의 모법답안을 엮었으니 얼마나 좋은 책이었을까 싶다. 

아마도 양반가 자제들에겐 핵심 전략서 정도 되지 않았을까. 

(요즘으로 치면 수능 만점자들의 핵심전략이랄까. 아니 논술문제의 모법답안 모음집 정도 될려나)

글쓰기 방법을 병법에 빗대어 저술했는데 3년전 이 문장을 접했는데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한 줄 아니 한 구절 읽고도 그 상징하는 바와 비유가

모르는 것도 많고 알고나면 놀라운 것도 많아서

단숨에 읽어내려 가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한자로 쓰여진 글이고 한 단어에도 그 뜻에 고사가 들어 있어서

한 줄 읽고도 그에 담긴 뜻을 온전히 이해 할려면

몇시간은 걸릴 정도로 깊이 있는 글이다.

본문보다 주석이 몇 배되는 분량이다. 

 

 

무릇 장평의 병졸은 그 용맹이 옛날과 다르지 않고 확과 창의 예리함도 전날과 변함이 없었지만, 염파가 거느리면 승리할 수 있고, 조팔이 거느리면 자멸하기에 족하였다. 그러므로 용병 잘하는 자에게는 버릴 병졸이 없고, 글을 잘 짓는 자에게는 따로 가려 쓸 글자가 없다. 진실로 좋은 장수를 만나면 호미자루나 창자루를들어도 굳세고 사나운 병졸이 되고, 헝겊을 찢어 장대끝에 매달더라도 사뭇 정채를 띤 깃발이 된다. 만약 이치에 맞다면 집에서 늘 쓰는 말도 오히려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고, 동요나 속담도 이아에 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글이 능숙하지 못한 것은 글자의 탓이 아닌 것이다.

 

(명장 염파에 대한 얘기다. 같은 군사라도 조팔이 거느리면 패하고 염파가 거느리면 승리했다는 전국시대 실전얘기하고 한다. )결국 상대가 잘하고 못하고도 리더 나에게 달렸다는 얘기 같습니다.

 

 

 

무릇 자구가 우아한지 속된지나 따지고 편장의 우열이나 논하는 자들은 모두 변통의 임기응변과 승리의 임시방편을 모르는 자들이다. 비유하자면 용맹스럽지 못한 장수가 마음에 미리 정해 놓은 계책이 없는 것과 같아서, 갑자기 어떤 제목에 부딪치면 우뚝하기가 마치 견고한 성을 마주한 것과 같아 눈앞의 붓과 먹이 산 위의 초목을 보고 먼저 기가 질려 버리고 가슴속에 기억하고 외우던 것이 진작에 모래 속의 원학이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글 짓는 자의 걱정은 항상 스스로 갈 길을 잃고 요령을 얻지 못할까 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무릇 갈 길이 밝지 못하면 한 글자도 써 내려가기 어려워져서 항상 더디고 껄끄러움을 고민하게되고, 요령을 얻지 못하면 두루 얽어매기를 아무리 튼튼히 해도 허술함을 걱정하게 되니. 진실로 한마디 말로 정곡을 찌르기를 눈 오는 밤에 채주에 쳐들어가듯이, 한마디 말로 핵심을 뽑아내기를 세 차례 북을 울리고 관문을 빼앗듯이해서,  글을 짓는 방도가 이 정도는 되어야 지극하다 할 것이다.

 

나의 벗 이중존이 우리나라 사람이 지은 고금의 과체(과거시험에서 보이던 여러 문체의 글)를 모아 10권으로 편집하고 그 이름을 소단적치라 했다. 아! 이는 모두 승리를 거둔 병졸이요, 수백 번의 싸움을 치른 결과물이다. 비록 그 격식이 같지 않고 정교한 것과 거친 것이 뒤섞여 들어가 있지만, 각각이 승리할 계책을 지니고 있어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다. 그 예리한 창끝과 맢날의 삼엄함은 무기고와 같고, 때에 맞춰 적을 제압하는 것은 늘 병법에 맞는다

 

앞으로 글을 하는 자들이 이 길을 따라간다면, 정원후의 비식(널리 알리는 것)과 연연산에 명을 새긴 것이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방관의 거전은 앞사람을 자취를 본받았으니 실패했고, 우후의 증도는 옛법을 역이용하여 승리햇으니. 그 변통하는 방법은 역시 때에 있는 것이지 법에 있는 것이 아니다.(연암의 중심사상. 법고 창신의 이야기다. 옛 것(고문)에 메이지 말고, 당대 현실문제를 떠난 고문은 의미가 없다는 현실이 중요하다는.)

 

붓과 먹은 날카롭고 글자와 글귀는 날고 뛴다. 이야말로 문예계의 염파와 이목이라 할 것이다

 

세상의 이른바 '글제를 고려해서 거기에 꼭 들어맞게 지은 글' 이란 것으로 과거를 위한 글을 짓게 되면, 동전을 주조하는 데 납이 섞이고 철이 섞여서 겉으로는 마치 정련된 것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실은 경박하고 부실한 것과 같다. 진실로 충분히 고려하고 충분히 꼭 들어맞도록 하여 한 글자도 겉도는 말이나 두서없는 말이 없게  할 수 있다면, 이야말로 득의한 것이어서 고문 중에서도 뛰어난 것일 터이다

 

주제를 결정하여 글을 엮기를 울료자에게 병법을 말할 때나 정불식이 군사를 출동할 때 처럼 한다면 당연히 공령문, 과체문의 훌륭한 글이 될 것이다. 편마다 이와 같다면 어찌 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으로 감복하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글의 특징은 비유를 통해서 문장 작법의 정치한 논리를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인정하는 가치관을 격파하고

자신의 주장을 펴는 글쓰기를 감행하라는 얘기지요.

그리고  반대되는 논리를 격파하기 위해서 주제를 설정해야 하며,

 공격의 목표가 없는 글은 글자나 뜻의 나열에 그칠우려를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기존 방식을 깨트리기 위해서 면민하게 계획된 표현방법을 두루 동원,

 직설법을 배격해야 한다는 논리도 있습니다.

즉 상대방을 긴장시키지 않고 공격하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얘기구요

 이런 것을 유격훈련이라고 하나요.

즉 상대의 허점을 파고 들어 예측 어려운 변화 가운데 진실을 확인하라는 것이다.

일상어의 우월과 창신한 글쓰기 원리를 소개한 글입니다.

 

 

기양증이라고 하지요. 가려움증,, 가려운데 긁고 싶은 마음,

그것이 글쓰는 이들의 마음에 닿아 있다고 합니다.

옛날 폐관잡서라고 소설을 배격하던 조선시대때

어떤 이가  작가의 글쓰기를 기양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기양증과 비슷한 동기인지는 모르지만 재밌고 유익한 글이라 생각됩니다.

 

 

 

 

박지원 1737~1805년

조선 후기 문인이자 학자, 호는 연암, 1768년에 백탑근처로 이사하여 이때부터 이서고,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과 본격적으로 교유하였다. 홍국영의 위협을 피해 황해도 금천 연암협에 은거하였다가 1780년 삼종형 박명원을 따라 연경에 다녀와 <열하일기>를 저술했다. 그의 저술은 현실 개혁의 의지와 문인다운 깊은 사유가 담겨 있어 당시 문인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문집으로 연암집이 전한다.

 

주참조.. 글과 생각 박종성 조남철 이호권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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