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기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줄리언 반스 장편 /최세희 옮김

구름뜰 2013. 7. 4. 22:21

 

 

1960년대 영국 케임브리지.

장래가 촉망되던 장학생 에이드리언 핀이 욕실에서 동맥을 긋고 자살한다.

철학적이고 총명한 수재였던 그는 누구에게나 사랑받았다.

심지어 친구의 여자친구 베로니카에게도,

아무도 그 자살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 사십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그의 친구였던 앤서니 웹스터는 자신이 무심코 에이드리언에게 보낸.

이제는 기억하지도 못하는 한 통의 편지에 엄청난 파국을 불러왔음을 알게 된다.

 

 

 

2번 읽을 것 - 한 번 읽으면 안 읽은 것이나 마찬가지임. 

반전 2가지를 찾아 볼 것

<독서토론> 모임에서 이 책을 나눠주면서 책을 선정한 이가 한 말이다.

이래 저래 바빠서 토론 날에 맞춰 한 번 만 읽었다.

그리고 오늘 토론을 마치고 돌아와 역시 안 읽은 것만 못한 것 같아서 한 번 더. 

복선이 뛰어나다. 허투루 쓴 문장이 하나도 없다.

 김연수 작가의 평처럼 우리가 인생의 말년에 되짚어 보면,

 마지막 장면을 염두에 두고 쓴 소설처럼

인에 의한 연이라는 것이 맞아떨어진다.

그것이 운명이든 숙명이든 어쨌거나 그렇다.

 

 

재미보다는 주인공 토니(앤서니 웹스터)의 자전적 회상을 따라가면서

지금 60살이 된 화자가 스무살 시절 그리고 그 이전 이후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하는 부분부터 조심스럽게 이입해서 읽게 된다.

 

어쨌거나 반짝반짝 빛나는 문장들 여기에다 정리해 본다.

 

 

 

 

 

 

이 세상에 초침만큼 이치를 벗어나지 않는게 또 있을까. 하지만 굳이 시간의 유연성을 깨닫고 싶다면, 약간의 여흥이나 고통만으로 충분하다. 시간에 박차를 가하는 감정이 있고, 한편으로 그것을 더디게 하는 감정이 있다.

 

진정한 문학은 주인공들의 행위와 사유를 통해 심리적이고 , 정서적이고, 사회적인 진실을 드러내야 했다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입니다." 내 대답은 좀 빠르다 싶게 튀어나왔다.

"그래 안 그래도 자네가 그렇게 말할까봐 걱정을 좀 했는데. 그게 또한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기도 한 것이기도 해?"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 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경청하게 하려면 언성을 높이는 게 아니라 낮추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다. 그래야 진짜로 이목을 끌 수 있게 된다.

 

에이드리언은 마지막 남긴 편지에서 검시관에게 자신의 자살이유를 설명해 놓았다. 그는 '삶이 바란 적이 없음에도 받게 된 선물이며, 사유하는 자는 삶의 본질과 그 삶에 달린 조건 모두를 시험할 철학적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만약 바란적이 없는 그 선물을 포기하겠다고 결정했다면 결정대로 행동을 취할 윤리적, 인간적 의무가 있다는 것이어다.

 

그는  나보다 도량이 넓고 준열한 기질의 소유자였다. 그는 논리적으로 사고했고, 논리적 사고로 도출한 결론에 따라 행동했다. 반면 우리 대부분은, 정반대로 행동하는 것 같다. 우리는 충동적으로 결정한 다음, 그 결정을 정당화할 논거의 하부구조를 세운다. 그런후,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를 상식이라고 말한다. 에이드리언의 자살이 우리 모두에 대한 함축적 비판을 담은 거라고 생각하느냐고? 아니다 적어도 그에게 그런 의도는 없었다고 확신 할 수 있다 .에어드리언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는지는 모르지만 자기를 스승으로 모시라는 식으로 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결혼 이란 처음에는 푸딩이 나오지만 그다음부턴 맛없는 음식만 나오는 식사라고 말한 적이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에이드리언

-1부  중에서

 

 

 

 

다섯 달 먼저 태어난 어떤 사람은, 아무리 정반대의 증거가 존재한다고 해도, 자신이 다섯 달 늦게 태어난 사람보다 늘 현명하고 식견도 풍부하다고 옹고집처럼 믿는다는 것이다. 혹은, 바로 그 반대의 증거 때문에 더더욱 고집을 부리게 된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경우 대게의 객관적인 관찰자들은 백이면 백 조금이라도 더 젊은 사람의 손을 들어주게 마련이므로, 때문에 그 반대편은 나이가 많은 쪽의 우월함을 더욱 철저하게 , 더욱 신경증적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기억이란 사건과 시간을 합친 것과 동등하다고, 그러나 그것은 그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하다. 기억은 우리가 잊어버렸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살아갈 날이 줄어들수록 헛되이 살고 싶지 않게 된다. 그게 당연한 거 아닌가. 짜투리 시간을 아무리 활용한다 해도... 여튼 그건 젊었을 때는 미처 예견하지 못하는 문제 중 하나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처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여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친구(에이드리언)가 자신의 여자친구였던 베로니카와 사귀고 싶다고 서신을 보내온다.

 자신보다 명석하고 현명하고 철학적이었던 친구 에이드리언!

사귀긴 했었지만 자신보다 월등히 성숙했던 베로니카!

그녀를 만나는 동안 한번도 그녀를 이해한 느낌이 든적 없었던 토니는 

에이드리언이 서신을 받고 열패감 같은 것을 경험했는지 모른다.

그런 서술은 없다.

 

어쨌거나 사십년이 지난 후 자신이 그때 쓴 편지를 베로니카한데서 건네받는다.

 기억속에는 전혀 없는 편지지만 자신의  글씨라는 읽기도 전에 바로 안다.

같이 보라고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를 각각 명명하며 

더는 해악이 있을 수 있을 까 싶게  저주를 퍼부은 편지다.

두사람의 미래에 대한 악담. 

이 책 원제 <TE SENSE OF AN ENDING>와 딱 맞아 떨어진다.

그리고 완벽하게 그 말이 씨가 되어 있는 현실을 보게 된다. 

 

 

그 편지를 쓴 당시의 나와 현재의 나는 다르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이지 나의 어떤 성정이 나를 부추겨 그런 편지를 쓰게 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고도의 자기기만인지도 모른다.  

 

그가 죽기 전 나한테서 마지막으로 받은 서신이었다. 그의 인성에 대한 명예훼손이자 그의 인생 최초이자 최후의 사랑을 파괴하려는 시도였다. 그리고 이 편지에서 시간이 말해줄 거라고 썼을 때 나는 과소평가, 아니 계산착오를 저질렀으니. 시간은 그들이 아니라 나를 비판하고 있었다.

 

사람은 가장 젊고 민감한 시절에 상처도 가장 많이 받는다. 반면 끓어오르던 피가 서서히 잦아들고, 감정이 전보다 무뎌지면서 더 든든히 무장을 하고 상처를 견딜 줄 알게 되면, 예전보다 더 신중하게 운신하게 된다.

 

회환의 감정, 더 복잡하고 온통 엉겨붙어버린 원시적인 감정이다. 그런 감정의 특징은 속수무책으로 견디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블랙박스는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테이프는 자체적으로 기록을 지운다. 사고가 생기면 사고가 일어난 원인은 명확히 알 수 있다. 사고가 없으면 인생의 운행일지는 더욱더 불투명해진다.

 

나 자신이 아둔하고 굴욕적으로 느껴졌던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의 마음에 영구히 존재하는 기대심리 때문이었다. 또한 그 이전에 타인의 경멸을 극복한다는 것의 묘미 때문이기도 했다. 평소 자만심 때문에 큰코 다칠 일은 없다고 생각해온 편인데. 사실은 스스로 생각한 것 이상으로 혼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이제 다시 생각해보니, 그녀는 나에게 한결같은 태도를 고수했다. 비단 최근 몇 달 동안이 아니라, 기한을 정할 수 없을 만큼 오랜 세월 동안, 그녀는 내가 성에 차지 않았고, 그러자 에이드리언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이 판단이 정확하다는 그녀의 믿음은 한 치도 흔들인 적이 없었다. 이는 여로 모로 보나, 철학적으로건 뭐건 간에 자명한 사실임을 나는 이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그런데도 나 자신이 동인을 이해하지도 못한채, 지금 이 나이에 와서, 나는 그녀가 나란 사람을 잘못 봤음을 증명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내가 썼던 말을 다시 읽을 때 나를 깨무는 이가 얼마나 그악스러웠을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내가 내뱉었는지 조차 잊고 있었던 그 말은 가히 고대의 저주처럼 여겨졌다. 물론, 나는 저주 같은 건 믿지 않는다. 그랫었다. 말이 씨가 된다느니 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도 나중에 일어날 일을 명명하는 행위 자체-콕 집어 나쁜 일이 일어나길 바라자 실제로 똑같이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 -에는 여전히 몸이 오싹해질 만큼 초자연적인 데가 있다. 저주를 퍼부었던 젊은 시절의 나와 그 저주가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목도한 노년의 내가 느끼는 감정은 사뭇 다르다는 사실, 이는 말도 안 될 정도로 서로 무관하다.

 

만약 이 모든 게 시작되기 직전에 누군가가 에이드리언이 자살을 한게 아니고, 베로니카와 결혼을 했고 자식을 하나 낳았고, 그런 후 또 낳았을 수도 있고, 손주까지 보았다는 말을 했다면 나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거 잘됐네. 그들 둘 모두에게 잘된 일이야..

 

내 철학자 친구, 인생을 직시하고 ,또 책임감 있고, 사유하는 개인이라면 누구나 바란 적조차 없던 이 선물을 거부할 권리를 누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던 친구. 그리고 그의 숭고한 제스처는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타협과 부박함으로 점철된 대부분의 인생을 새삼 떠올리게 했다. '대부분의 인생'즉 나의 인생.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쳤던 인간이 비로소 느끼게 된 고통, 그리고 바로 그랬기 때문에 느끼게 되니 고통이었다.

 

나는 일생을 통틀어 단 한 번만 춤을 추는 한 젊은 여자를 생각했다. 앞으로도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을 모든 것들 중에서 내가 지금 알지 못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에이드리언이 규정한 역사를 생각했다.

2부 중에서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에이드리언

 

 

경계해야 할 것은 자신이라는 것,

우리 삶은 자신의 무게를 감당하는 나날들일 뿐이다.

자식, 남편, 부모, 그리고 연인 그 무엇이든 결국은 내 실존의 부게다 나를 무겁게 하는 것이다..

내 존재의 무게만이 내가 거두어야 할 무게인 것이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한 소설가가 평생 좇아온 주제가 담겼더. 무거운 주제에 비해서 소설이 잘 읽히는 까닭은 최종적인 종말의 의미가 소설을 다 읽어야만 밝혀지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종말이 찾아온다는 점에서 모든 인생은 교훈이다. 종말의 관점에서 다시 인생을 되짚어보면, 모든 건 원인과 결과로 강하게 연결돼 있다는 것을 알게되니까.  마치 마지막 장면을 염두에 두고 정교하게 씌어진 소설을 읽을 때처럼.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그런 소설이다. 죽을 때에야 그 의미를 완전히 드러내는 우리 인생을 닮았다. 원서 150 페이지짜리인 이 소설을 두고 줄리언 반스는 "나는 이 작품이 3백 페이지짜리라고 생각한다," 고 말했다. 그래서 그건 꼭 인생에 대한 비유처럼 들린다. 마지막 순간, 이 인생의 의미가 드러날 때 우리는 한 번 더 이 인생을 살아갈 테니까-김연수(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