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수필

나의 남은 꿈

구름뜰 2013. 8. 15. 11:48

 

 

 

 논산 집 현관에 이런 글귀가 붙어 있다. "홀로 가득 차고 따뜻이 비어 있는 집" 검은 오석에 새겨진 이 판석은 논산 집의 리모델링을 끝내고 숙고 끝에 내가 직접 써 새겨 온 것이다. 재齋나 헌軒 혹은 당堂 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이 상례지만 조선 사대부의 전통을 따르는 그런 이름이 내 지향에는 과분한지라 소박한 한글 문장으로 그리 썼는데.  한자로 꼭 써야 한다면 만허재 (滿虛齋)나 만허당 (滿虛堂) 이라 하면 되겠다. 문제는 오는 사람마다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는 것이다. 쉬운 우리말 문장으로 썼는데 오히려 그게 만허재나 만허당보다 더 어려운 모양이다. 의미 전달에서 표음 문자인 한글보다 표의 문자인 한자가 얼마나 유리한지 그래서 알았다.

 

 작가는 두 개의 방을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다. 하나의 방은 단독자로 존재하는 '밀실'이요, 두 번째 방은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광장'이다. 쓰고 있을 때 그는 밀실에서 다만 혼자 있을 뿐이다. 카페에 앉아 글을 쓰는 버릇을 가진 작가도 있는데. 그 역시 글을 쓸 때만은 그 카페가 밀실이 된다. 글을 쓰기 위해선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지 않을 수 없다. 그 거리는 멀고도 가깝다. 그는 창 안쪽에서 창밖을 보는 사람이고, 오로지 홀로 앉아 문장이라는 창하나 비켜 들고 감히 세상 만물을 제패하려고 꿈꾸는 사람이다. '홀로 가득 차'있지 않고서야 대체 무엇을 어떻게 쓰겠는가.

 

 그렇다고 작가가 언제나 '밀실'에만 있는 건 아니다. 그는 쓰려는 글감들은 어쟀든 세상 속에 있기 때문에 그는 때로 그물을 감춰 든 어부의 마음, 때로 대상자의 명줄을 일격에 끊을 킬러 같은 눈을 갖고 세상 속을 자맥질해야 하는 존재다. 작가로서도 그렇거니와, 생활인으로서, 사회인으로서는 말할 것도 없다. 유의할 점은 생활에서나 사회적 관계망에서 너무 쉽게 그가 지닌 그물이나 킬러의 눈을 들키면 문제들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그러므로 생활 속에서, 관게망 속에서 '작가'를 감추고 살아야 하는 불필요한 불편을 또한 감수해야 한다. 작가가 군중이 가득 찬 광장을 걸으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깊은 고독을 느끼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남은 인생에서 나의 꿈도 그렇다. 홀로 있을 때 가득 차고 광장의 욕망으로부터 놓여나 따뜻히 빌 수 있다면 나는 아마 아름다운 말년을 보내게 도리 것이다. 그것 이외에 더 바랄 게 무엇이란 말인가.

-박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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