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기

젊은 날의 깨달음 - 하버드에서의 출가 그 후 10년 /혜민스님

구름뜰 2013. 11. 25. 10:05

 

만일 어떤 이가 자신의 것 하나만 알고 있다면

사실은 그 하나도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이다.

-독일 종교학자 막스 밀러

 

 

 

 

 

 " 스님, '출가 그 후 10년' 앞에 '하버ㄷ'라는 세 글자 좀 붙여서 넣게 해 주십시오, 그래야 불자 아닌 사람들도 이 책을 서점에서 집어서 읽어 보게 됩니다."

 

 이 책의 제목 선정을 두고 출판사 측과 여러 이야기가 오가면서 종국에는 '하버드' 이 세글자를 부제에서 빼느냐 마느냐를 가지고 약간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나는 하버드대학교에서 공부했다는 것이 옷의 브랜드 마크처럼 쓰이는 현재 한국의 현실이 당혹스럽고, 그것에 동조해 달라는 출판사의 요청이 승려로서 너무 난처하게만 느껴졌다. 사실 중요한 것은 하버드대에서 공부했고 안했고가 아니라 졸업 후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인데 말이다.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이다.

 이 책 부제 '하버드'가  걸렸는데

프롤로그에서 그리하게된 이유를 실어 놓았다.

 

 

 하버드 대 공부중 존이라는 친구를 알게 되었는데 존은 키가 크고 영화배우를 해도 될 만한 출중한 외모에댜 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하버드대 학부생이었다. 존은 활동적이면서 책임강이 감하고 붙임성도 좋아서 친구나 교수님들에게 인기가 많은 학생이었다. 나는 존을 중국어 수업을 들으면서 알게 되었고 그 후 같은 중국어 여름방학 연수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되면서 친하게 되었다.

 

 

 

 

 

 

 중국 북경에 처음 간 터라 나는 주말이 되면 이곳저곳 관광하기에 바빴는데 존은 이상하게도 금요일만 되면 학교 기숙사에서 사라지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놀러 다니는 사이에 존은 주말이 되면 북경역에서 기차를 타고 마을 전체가 에이즈에 감염된 지역에 가서 고아가 된 아이들을 위해 몰래 봉사하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누가 존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니었고 그렇게 했다고 존에게 누가 상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의사인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단지 존은 그렇게 봉사하는 것이 본인 스스로에게 의미 있는 여름 방학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다는 것이다. 경쟁 사회에서 끝없는 자기 개발만을 추구하는 사례들만 보아 온 나에게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존의 이런 모습은 일대 충격이었고, 이것이야말로 '하버드'를 통해 내가 배운 최고의 가르침이었다.

-프롤로그 중에서  

 

 

 

 

 

한 이 십 여일 전이었겠다.

금오산성 입구 홍례문 석조기둥에 담쟁이가 고와서 담아왔었다.

 

 

 

 

 

 

그리고 그제 주말에 가보니...

시간만이 세상을 다스리는 지혜가 아닌가 싶다

유한한 삶, 우리는 잠시 이 시간속을 흐르다 떠나야 한다.

남는 게 있을까

 어떤게 남을까

반드시 남겨야 할까.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라고 하지만

그것 또한 집착 아닐까

 

 아름다운 것만 남는 것 같다.

아름답게,,,

혜민스님이 하버드에서 배운 가르침은 

 어떤 것보다 존이었다고 기억하는 것처럼, 

 

역사적 인물보다 민담 설화의 미담 사례가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고

살아남는 것도 교훈적인 요소가 있기도 하지만

아름답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을 외면하는 삶은 멋없다

 

혼자서 느끼는 기쁨이 소통이 되면 멋이 되듯이 말이다.

 

 

 

 

 승복을 입게 된  후 가장 큰 변화라면 행복이라는것은 어떤 목표를 이룬 후에 찾는 것이 아니라 지금 바로 내 주변을 살피면서 조건 없이 나누어 줄 때 행복이 바로 나와 같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절에서 신도님들 한 분 한 분을 위해서 진정으로 기도하고 있을 때, 주변에 어려운 일을 당하신 분을 위해 어떻게든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도와주고 나서도 남에게 알리지 않고 그냥 잊어버리려고 애쓸 때. 적은 돈이더라도 순간순간 베풀었을 때. 나는 행복했다.

 

 우리의 삶이 소중한 만큼 언제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성공 이후의 행복을 꿈꾸기보다는 지금 내 주변을 돌아보면서 다른 사람들과 함게 바로 느낄 수 있는 행복을 선택하자고 나는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가 행복을 선택하기까지 중에서

 

 

 

 

 부처가 아닌 중생이기에 삶에 이런저런 기대를 하며 살게 되고 그 기대가 현실화되지 않았을 때 느끼는 실망을 나도 역시 겪어 보았고 그러기에 그 기분 너무도 잘 이해한다.

 

 그렇다면 실망이 우리 삶으로 찾아왔을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토록 원했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실망과 함께 오는 좌절과 상처는 어떻게 대처해야 치유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 실망의 나락에서 일어나 다시 걸을 수 있을까?

 

  그대여, 먼저 이 일로 인해 슬픔이 찾아오면 남에게 패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충분히 슬퍼하고 마음껏 울어라. 분노가 일어나거든 분노가 일어나는 나를 받아들이라. 마음속에 담아두지 말고 그대가 느끼는 심정을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에게 말로써 풀어라,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는 어쩌면 이것이 가장 중요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부정하지 말고 힘들어하는 나를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리고 마음이 조금 가라앉으면 나에게 시간이라는 선물을 주어라. 조용한 공원이나 사찰을 거닐면서 어머니가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대하듯 홀로 있는 시간 동안 힘들어하는 나를 아껴 주어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를 대하듯 나를 사랑해 주어라 이 시간에 음악을 들어도 좋고 혼자 서점에 가도 좋다.

 

 

  그리고 본인의 몸에 시간을 쏟아라.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실망의 감정으로 몸의 어느 부분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를 하나하나 알아차려 보자. 가슴이 아프다면 어떻게 아픈지 주의를 기울여 보자. 항상 밖으로만 돌던 마음의 에너지를 내 몸안으로 돌리면 잠시나마 번뇌가 쉬게 된다.

 

 

 마지막으로 마음이 조금식 안정을 되찾게 되면 봉했던 실망과 관련된 부분의기억을 서서히 열고 그 일에 최대한 객곽의 눈으로 바라보려고 하자, 그 일로 인해 삶이라는 학교는 분명 나에게 무슨 큰 가르침을 주려고 했던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절대로 서둘지 말고 천천히 살펴보자.

-아파하는 그대에게 중에서

 

 

 

 

 그때만 해도 시골에서 서울로 이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때라 내가 다니던 서울 외곽의 초등학교는 학생 수가 엄청나게 많았다. 한 반에 학생 수가 최소한 60명이 넘었고, 그런 큰 반이 한 학년에만 15반씩이나 되었다. 6학년이 되자 반별로 돌아가면서 일주일 씩 주번 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주번들은 학교 건물 안팎으로 배치되어 등하교 시간과 쉬는 시간에 나가서 다른 학생들을 규율에 따라 지도하고 학교 물건들을 정리하는 역할을 했다. 학교가 워낙 크다 보니 한 반 학생 모두가 주번을 서야 되었다.

 

 그런데 한 번은 공교롭게도 우리 반이 주번을 서게 될 때가 겨울의 막바지 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다. 아침 7시 45분부터 밖에 서 있던 우리들은 한 시간이 넘은 8시 50분쯤에야 교실로 들어올 수가 있었다. 그런데 추운 날씨 때문에 다들 몸이 꽁꽁 얼어서 무척 애를 먹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담임선생님께서 조개탄과 나무 받는 통을 들고 나가시더니 난로 땔감을 구해  오셨다. 우리들은 추춘 몸을 녹이려 금방 나무에 불을 지펴서 난로 안에 넣었다. 조개탄도 같이 넣고 난로 주위로 아이들이 빙 둘러앉아 몸을 녹였다.

 

 

 그런데 큰 문제가 발생했다. 갑자기 어디선가 교감선생님께서 나타나시더니 우리들을 보면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아직 온도가 영하 2도까지 안 떨어졌는데 누가 허락도 없이 난로에 불을 지피고 있나? 너희 담임선생님이 시켰느냐?

 

 갑작스러운 교감선생님의 호통에 반 전체가 조용해지고 담임선생님이 급히 나가셔서 교감선생님께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셨다.

 

 아이들이 주번을 서서 너무 추워하는 것 같아 아직 영하 2도는 아니지만 난로에 불을 피우게 했다고 말이다. 그런데도 교감선생님은 한 10분 동안 복도에서 큰 소리로 담임선생님을 야단치셨다. 복도에서 들려오는 담임선생님을 향한 교감선생님의 꾸중에 우리 반 아이들의 마음은 참으로 참담했다.

 

 우리를 위해서 그러신 건데 결국 담임선생님은 교감선생님 앞에서 눈물을 보이셨고, 교실로 들어오신 선생님과 같이 반 전체가 울었던 기억이 난다. 몇몇 아이들이 돈을 모아 자판기 커피를 사다 그리면서 선생님을 위로해 드렸는데 그때 커피컵을 두 손으로 잡으시면서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

 

 

 

 

 

 "얘들아, 너희들이 어른이 되면 정해진 규칙만 보고 사람을 보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지 마라. 그리고 사람이 실수를 했어도 때에 따라서는 큰 아량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거라"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산수나 국어 같은 많은 과목을 배웠지만 그것에 대한 기억은 전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선생님의 그 한마디는 줄곧 내 가슴에 생생히 각인되어 왔다.

- 선생님의 눈물 중에서

 

 

 

 우리가 꿈을 꾸다 보면 꿈속에서 많은 대상을 보고 만나고 경험한다. 하지만 그 꿈 안에서 보여지는 대상들은 우리의 의식을 떠나서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꿈속에서 호랑이를 보았다면 그 호랑이는 내 마음이 그려낸 영상일 뿐 꿈 밖에서 실재로 존재하는 호랑이가 아니다. 하지만 내 마음은 내가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꿈속에서 보여지는 영상이 내 마음이 만들어 낸 영상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실제로 내 의식과는 따로 존재한다고 느낀다. 

 

 그러기에 꿈 안에서 호랑이를 만나 놀라기도 하고 무서워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그러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꿈을 꾸는 이가 본인이 지금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꿈속에서 인식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꿈에서 보여지는 일체 대상에 대해 초연해지면서 그것들에 대한 집착 역시 다 끊어져 나갈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꿈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 마음 스스로가 만드러낸 영상을 우리 마음 스스로가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교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우리 삶도 우리가 꾸는 꿈과 다름이 없다 한다. 내가 평소에 경험하는 모든 대상들 역시 내 마음의 범주를 벗어나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이 만들어 낸 모습을 내 마음이 보고 있다 한다.

-마음이 마음을 본다 중에서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일체, 즉  보이는 현상과 보는 내가 둘이 아니라

내 마음안에서 일어난 작용을 오감으로 판단하는 것이라는 견해다.

나를 떠나서는 세상이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지금 내가 보는 것이 꿈에서 처럼 내마음 작용이고

그래서 지금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을 허상이라고 생각하면

지금 상황에 덜 메이게 된다.

집착을 놓아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그렇다.

 

실제로 우리가 그런 인식을 가져보지 못하고 살아왔으므로 

 이런 인식을 가져도 

생활속에서 살아가기란 살아온 세월만큼 쌓인 습 때문에 쉽지 않다.

그러하더라도 이런 인식을 가진 다는 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