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 살고 싶소' 라고
노래한 노천명의 시와 잘 어울리는 집,
화단엔 채송화, 봉숭아, 금잔화, 백일홍, 꽃이란 꽃은 다 있는 곳,
그 뒤 담장 아래 텃밭까지 들여 놓은 곳,
화단을 돋우어 만든 기왓장 하나하나에서 여인의 섬세한 손길이 느껴지는 곳,
대문이 없어도 무섭지 않다는 곳.
얼굴 본지가 30년은 넘은 고향 친구가 거창에서 가까운 함양에 자리를 잡았다.
7가구만 사는 마을 풀벌레 소리만 있는 산동네였다.
마치 아지트라도 생긴양 고향친구들이 뭉쳤다.
지난 월요일은 하루종일 비가 억수같았다.
먼저 거창에서 만나서 고향 굼뜰로 향했다.
친구 엄마들을 만나뵈었는데 단박에 알아보진 못했다.
친구들이 언니나 오빠이름을 대면, 닮았다 닮았다를 연발하시기도 하고,
그렇게 그렇게 묵혀있던 옛날을 잠시라도 떠올려보며 동네 한바퀴를 돌았다.
옛날에 빨래하던 도랑가
비라도 며칠 오고나면 황톳물이 거침없이 도랑의 풀까지 싹쓸어 버리는 걸
바라다 보던 그 논둑 밭둑가를 거닐어 보기도 했다.
추억의 장소에 서니 모르고 잊고 있었던 이야기들이 실타래처럼 풀어져 나왔다..
함양은 오후 늦게서야 도착했다.
마주 앉아서 나누는 얘기에 저녁밥상을 물리고 나니 열시던가.
밤이 새도록 여우나는 산골얘기는 아니었지만,
어릴적 놀았던 이야기들이 고구마줄기처럼 당기면 당길수록 끌려나왔다.
함께였지만 다른 모습도 있고, 내 이야기지만 내 친구의 기억이 더 선명해서 고마운 일들,
한 터에서 자라나 한 터에 모이니 이제는 어느 장소든 모이는 곳이 고향이겠다.
온종일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데도 서울에서도 두 친구가 와 주었다.
나야 구미에서 두어 시간이면 충분한 거리,
서울친구는 우리 마을 풍경이 아닌 곳에서도 들떠 있었다.
차를 세우고 비를 맞아가며 찍는 모습이라니..
그렇게 만리장성을 쌓을만큼의 한 밤을 보내고,
친구는 이렇게 멋진 음식을 만들어 냈다.
친정 엄마처럼,
지난 가을에 늙은 호박을 말린 호박고지를 넣은 것이라고 했고,
찹쌀가루로 만들었는데. 금방 한 떡이라서 그런지 정말 맛났다.
아침에 눈뜨고 보니 이웃집 개가 손님왔다고 예까지 와서 반겨주고
고양이가 돌담가를 어슬렁 거린다.
녀석들에게도 우리가 반가운 손님일런가.. ㅎㅎ
.
거창에서는 송편을 대구의 만두처럼 빗는다.
그러니 대구쪽에서는 우리 엄마 송편만 이런 모양이다.
한데 거창 장터에 가니 우리 엄마 송편같은 송편 뿐이었다.
고향이라니.
친구들도 엄마 맛이 그리웠을까.
추억 때문에 거창 재래시장에 들러서 송편은 미리 사들고 간 거였다.
집에서 이십 분 거리가 지리산 칠선계곡이었다.
그 산자락 어디쯤에 산책하기에 좋은 절이 있었다.
객지 친구라면 이렇게 쉽게 동화될 수 있을까.
여기까지 온 길이 어찌 순탄한 길만 있었을까.
길이 가파르고 힘들수록 우리 삶은 더 풍요로워 지는 것 아닐까.
지금, 우리는 함께할 수 있으니 그저 좋은 것이다.
그냥, 그냥 좋은 것이다.
살아온 세월, 켜켜히 않은 더케가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그 속에 시간과 시간을 묵혀 곰삭인 정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암정사' 정말 특이한 곳이었다.
이곳이 일주문 인 셈인데 사천왕상들이 노천 자연석 바위에 조각되어 있었다.
그 디테일이 어찌나 화려하고 아름다운지
언제 제작되었는지는 몰라도 놀라운 도공의 솜씨가 느껴졌다.
무서운 신장님! 들이 아니라 아름다운 신장님들이었다.
창건 연도 같은 것을 참조하지 못하고 왔다.
전날온 비로 쑥부쟁이가 물기를 잔뜩 머금고 반긴다.
저러고 존재하는 것이 오는 이들을 반기는 일이라니. 우리 삶이 꽃만 같다면...
대웅전 단청 또한 화려했다. 황금에 주황을 섞은 것 같은 색이 주조를 이뤘는데. 중국식일까 싶은 느낌이 들만큼 이채로웠다. 노스님께서 화엄경에 부처님이 여러 모습으로 나투시는 것처럼 대웅전의 모습도 다르게 나타내고 싶으셨다고 하셨다. 건립된지 그리 오래된 대웅전 같지는 않았다.
내고향 굼뜰(구름뜰) 친구들!
운명이 있다면 이런 것도 운명인 것이다.
대한민국 거창 굼뜰에서 담장 하나 건너 둘 두고 태어났다는 것,
자연환경이 같았으니 성향도 비슷하고 식성도 비슷하고. 여튼 우리가 다 가늠하지 못하는 그런 것들이 우리를 감싸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까지......,
지나온 길
내가 걸어온 길.
네가 걸어온 길.
여기까지의 길은 달랐지만,
이렇게 한길에 모이고 보니 감회롭기만 하다.
건강에 신경쓸 나이라는 공통 분모가 있고,
고향이라는 유대가 주는 편안함도 있다.
풀고 싶은 보따리도 많아서 올 가을에서 겨울사이에 1박 2일을 한 번 더 기약했다.
친구는 텃밭 고구마를 수확해두고 기다리겠노라고 했고
아궁이 불과 거실 난로불에 군밤 구울 재미에 입맛 다시는 친구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나보다 고향을 더 멀리 떠나 살아서 그런지
서울 친구들이 향수가 더 한듯 했다.
함양, 상림숲에 있는 오곡밥집이다.
안의 '행복마을' 정경,
화요일은 구름이 유독 아름다운 날이었다.
아무리 덥다고 우겨도 가을이 저 하늘에 먼저 와서 내려다 보고 있는 것 같다.
마지막 곡식들을 위하여 조금은 기다리는 중이라고.. . ㅎㅎ
친구들과 헤어져 거창을지나 굼뜰을 지나는 데 친척 아주머니가 과수원 앞에서 포도를 팔고 계셨다. 차를 세우고 다가가니 알아보셨다. 그 포도 맛보이고 싶어서 외가엘 들렀는데. 양파 한자루 기어코 실어주시는 이 송구스런 발걸음을 어쩔까. 3번 국도 아니랄까봐..
다 모이진 못했지만 그래도 회포는 풀었다. 고향엔 또래가 많아서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놀거리가 사철 가동되는 놀거리 생산공장같았다. 무엇을 하든 잘 놀았다.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것에서부터 놀이에는 탁월한 관찰력까지 겸비했으니. 요즘으로 치면 개콘의 개그맨 뺨치는 감각 넘치는 성향들이다. 그 성향 어디갔을까. 여전히 유쾌한 친구들, 굼뜰을 지나 3번 국도를 달려 굼뜰 구름일까. 새의 비상같은 구름이 이번 여행의 여운을 더해준다. 구름, 구름뜰, 굼뜰 ...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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