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수필

두 그루의 달맞이꽃

구름뜰 2016. 1. 20. 08:37

 

 얼마 전까지 살던 산골짜기 마을에서 나는 산책을 많이 했다. 나무며 풀들리며 많이 관찰할 수 있었다. 큰물이 났을 때 개울 축대가 무너져 내렸다. 축대 위에선 해마다 코스모스가 자랐다. 새로 축대를 쌓으면서 시멘트를 넓게 발라  코스모스 자랄 데가 없어져버렸다.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그 시멘트 위에 오랫동안 멈춰 서 있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작은 싹을 그곳에서 발견했다. 그 작은 식물이 달맞이꽃인 줄 금방 알았다.

 

 나는 너무나 기뻐서 산책을 할 때면 꼭 그곳엘 들렀다. 그리고 그 식물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면서 칭송했다. 이 험한 시멘트 바닥에서 살기 시작했고, 누가 봐도 그것이 달맡이꽃인 줄 알 수 있게끔 자란 걸 대견해했다. 얼마쯤 지나서 근처에서 또 다른 달맞이꽃 싹이 나타났다. 나는 그 두 꽃나무를 보느라고 즐거웠다.

 

 먼저 난 줄기는 아주 잘 자라났다. 그런 줄기를 보노라면 기운이 솟았다. 씩씩하게 보였고 나에게 교훈을 주려 격려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중 나중에 난 것은 아주 느리게 커갔다. 한여름이 되었을 때 나는 큰 줄기만 바라보게 되었다.

 

 그 큰것은 거의 내 머리에 이를 만큼 바랐고, 사방으로 뻗친 힘찬 가지 끝마다 꽃봉오리들을 수없이 달고 있었다. 나는 그 나무를 볼 때마다 용맹스러운 연개소문 장군을 만난 것처럼 기쁘고 흐뭇했다.

 

 여름이 깊어가자 그늘 하나 없는 축대 위에서 그 큰 줄기는 푸른빛이 나도록 싱싱했고 불사조처럼 위엄 있게 서 있었다. 나는 원시인처럼 그것을 경배했다. 큰 바람이 불었다. 그 큰 줄기가 부러졌다. 한가운데기 확실하게 꺽여 있었다. 나는 민망했다. 그걸 보는 게 부끄러웠다. 남의 좋지 않은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실례를 범한 것 같아 얼른 그곳을 떠났다.

 

 더 이상 죄스러워서 그곳에 갈 수가 없었다. 바람이 오면 부러질 걸 모르고 그렇게 줄기를 키워가기만 한 것을 거침없이 칭송만 해대던 내가 공범자 같았다.

 

 산책할 때 나는 차츰 그곳을 피해 갔다. 이제 그곳을 떠나 아파트로 이사해 온 나는 얼마 전 조심스런 마음으로 몰래 그곳엘 갔었다. 그 큰 줄기는 짧은 밑동만 남긴 채 앙상하게 말라 죽어 있었다. 그런데 그 옆에 있는 또 하나의 달맡이꽃 그루가 환한 레몬노랑빛 꽃을 가지마다 매단 채 조용히 서 있었다.

 

 끝이 조금씩 붉게 물들었던 잎사귀는 시들었지만 작은 나무는 따스한 겨울햇살 속에서 나를 보며 웃어주었다. 나도 아주 작게 따라 웃었다.

-점선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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