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수필

첫사랑

구름뜰 2016. 7. 4. 09:21


 





바람이 몹시 불던
어느 봄날 저녁이었다

그녀의 집 대문 앞에
빈 스티로폼 박스가
바람에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다

밤새 그리 뒹굴 것 같아
커다란 돌멩이 하나 주워와
그 안에
넣어 주었다
- 고영민(1968~ )



전혀 이질적인 것을 연결해 ‘새로운 전체’를 만들어내는 상상력을 엘리엇(TS Eliot)은 ‘통합된 감수성(associated sensibility)’이라고 하였다. 이 시는 엉뚱하게도 스티로폼 박스와 돌멩이를 연결해 첫사랑을 그려내고 있다. 사랑은 흔들리고 “이리저리” 뒹구는 것들을 ‘가만히’ 눌러 중심을 잡아주는 과정이다. 바람이 몹시 부는 “봄날”은 사랑의 불안한 상태를, “돌멩이”는 사랑의 안전한 무게중심을 지시하는 기표다. 불안-안전의 이 팽팽한 긴장 사이에 사랑이 존재한다. 게다가 첫사랑이라니.
-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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