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블럭 한 페이지에
지렁이 한 마리 온 몸을 밀어 무언가 쓰고 있다
철자법이 맞지 않아도
똑똑한 사람들 모두 비라고 읽는다
한 획만으로도 충분히
천기를 누설하고 있다
내일은 꿈틀꿈틀 비 오시는 날
비라고 써도 사랑이라고 읽는 사람에게
긴 긴 연애편지나 써야겠다
- 이화은(1947~)
‘징후’는 침묵의 언어다. 징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많은 것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징후는 ‘침묵의 웅변’이다. 지렁이의 언어는 징후의 언어이다. 징후에서 “천기”를 읽어내는 것이 ‘해석’이다. 이 해석의 회로에서 지렁이는 비를 낳고 비는 사랑을 낳는다.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