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수필

속수무책

구름뜰 2016. 12. 27. 07:48



도마 위에서 안간힘을 쓰는 광어를 어찌할까

이를테면 연민 때문인데

납작 엎드려 살아온 것이 죄는 아니지 않은가

한쪽만 보고 살아 다른 한쪽을 외면한 것이

정말 죄는 아니지 않은가

저 살 속에 저며 있는 바다의 노래에 귀 기울이면

가시들의 일상이 다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마지막 헤엄은 눈물 속을 헤매는 법이고

이제 속속들이 칼날이 닿으면

한 접시의 순결한 고백만 남을 것

모든 속수무책의 생애에 대해

오직 천사 같은 몸부림에 대

- 조항록(1967~ )




폴 드 만(Paul de Man)이 지적한 것처럼 통찰(insight)은 맹목(blindness)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모든 통찰은 바로 그 통찰 때문에 ‘보지 못하는 부분’(맹목)을 남긴다. 연민 때문에 ‘사실’을 보지 못하거나 사실에 집중하기 때문에 인간적 감정을 놓치기도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늘 세계에 대한 ‘오독(誤讀)’의 위험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돼 있는 셈인데 통찰이 한순간에 맹목이 돼 버리는 순간을 경험할 때, 남는 것은 “한 접시의 순결한 고백”밖에 없다. 부디 “모든 속수무책의 생애” 안에서 “오직 천사 같은 몸부림”을 읽어 주기를.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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