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어디선가 지금 울고 있는 사람,
까닭없이 울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우는 것이다.
세상 어디선가 지금 웃고 있는 사람,
까닭 없이 웃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비웃는 것이다
세상 어디선가 지금 걷고 있는 사람
덧없이 헤매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찾아 오는 것이다
세살 어디서 누군가 죽고 있다
까닭 없이 죽어가는 그 사람은
나를 쳐다보고 있다.
-가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
영적 개안의 전율 같은 것이 이 시에는 있다. 지상의 어디선가 지금 일어나는 일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는 것임을, 아무리 사소한 일도 우리 모두에 속하는 것임을 보아버린 것이다. 20대 중반 릴케의 시편들은 러시아 여행으로부터 얻은 이 깊은 눈으로 하여 참으로 겸허하고 경건하다. 릴케에게 씌워져 있는 ‘로맨틱한 서정시인’의 이미지는 얼마간 교정될 필요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란 이름의 대학살(사상자 1000만 명)과 유럽 주민들의 절망에 대한 실감이 없이는 『두이노의 비가』에 스민 고뇌와 고투를 따라 읽기 어렵다. 이승만 대통령과 동갑이었다고 하면, 릴케가 살아냈던 시대가 좀 더 가까이 실감될 수 있을까.
<김사인·시인·동덕여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출처: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엄숙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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