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기

불화하는 말들/ 이성복

구름뜰 2017. 3. 26. 08:07

 


이 책은 2006년과 2007년 사이 시 창작 강좌 수업 내용을 김수상, 박주연 씨가 시의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두서없는 이야기들을 격의 없는 어조로 가다듬어주신 두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2015년 7월 이성복


인연이 닿아서 동인들끼리 모여 시수업을 하고 있다

교재가 두권인데 그중 '불화하는 말들'에 실린 글을 여기다 올려 본다.

동인들과 공감도 좋지만 여기 올려두고 짬날 때마다 음미하려 한다.

읽다보면 이성복 시인의 수업에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이 있어서

수업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도 여운이 따라온다.


시가 내 맘대로 안 되어도 가치있는 일이라는 걸 알기에

나는 이 일을 그만 둘수는 없다.


혼자보기 아까운 문장들 올려 본다.

볼 줄 알고 들을 줄 아는 이여 즐감하시길...




0


시가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는

네 가지 요소를 살펴봐야 해요

작자, 언어, 대상, 독자


모든 허물은 나에게 있다 하지요.


언어, 대상 독자에 대한

나의 생각과 태도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러닝 소매에 머리를 집어넣으려는 아이나

매연을 뿜으며 내달리는 트럭과 뭐 다르겠어요.


어디 시 쓰는 일에서만 그러할까요.

'안 좋은 시인의 사랑을 받는

남(여)자는 얼마나 안 행복할까.'

(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1


시 쓰는 공부는 가파른 길이에요

자기 자신을 내거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결국 삶은 사라지고 시만 남겠지요.



예술과 삶은 거의 같이 나가는 것 같아요.

예술 가지고 장난치거나 멋부리면 안 돼요

무엇보다 정성이 있어야 해요.



2


기도에는 묵상기도와 관상기도가 있는데


묵상기도는 나 자신이 예수님의 생애를 기억하는 것이고

관상기도는 예수님이 나를 통해 자신의 생애를 기억하는 거예요.


묵상기도의 주체가

관상기도에서는 역주체로 바뀌는 것이지요.


자신을 온전히 신에게 내맡기는 관상기도는

시 쓰기의 마지막 꿈이라 할 수 있지요.






3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에서 노파 역의 배우는

돌절구에 이빨을 부딪치는 연기를 하는데.

실제로 두세 개를 부러뜨렸다 해요.


저처럼 겁 많은 사람은

예술 안 하면 안 했지. 그런 거 못해요.


이런 게 예술가와 딴따라의 차이일 거예요.

예술, 자신의 전 생애를 거는 것!



4


아담아 너는 어디에 있느냐?

인간은 이런 본질적인 물음을 늘 피해 다녀요.


시는 계속해서 그 물음을 되살리는 거예요.

시 쓰기가 불편한 것은 그 때문이에요.


시 쓰기는 세상과 자신에게 민감해지는 일이에요.

시인은 인생과 발가벗고 동침하는 사람이에요.





5


언제든지 나 자신이 욕먹는 방식을 취해야지

남을 욕하는 방식은 영 아니에요.


로댕이 공방에서 일할 때, 한 장인이 그랬대요.

"로댕, 그렇게 하면 깊이감이 안 생겨.

이파리를 너 쪽으로 향하게 해봐........"


시라는 칼은 손잡이까지도 칼날이에요.

남을 찌르려 하면 자기가 먼저 찔려야 해요.



6


동산병원 의사로 계시는 임만빈 선생님이

수필집을 내셨는데 제목이 참 예뻐요.

'선생님 안 나아서 미안해요'


이렇게 책임을 자기 쪽으로 돌려놓으면 예뻐져요.

'의미 있는 나'라는 것은 '깨지는 나' 예요.

내가 깨져야 세상이 달라져요.



8


가려운 데를 박박 긁으면 쾌감이 있지요.

그러나 긁고 싶은 대로 다 긁고 나면

온통 피투성이가 되지요.


시 쓸 때 들어가는 문은 가려움,

나가는 문은 따가움,

들어가는 문은 부질없음,

나가는 문은 속절없음이에요.


언제나 가까운 데서 찾고,

다른 데서 가져오려 하지 마세요.

무엇보다 자기에게 절실해야 해요.

쓰고 나서 많이 아파야 해요.






9


시는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 반성이에요.

어떻게 반성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하지 마세요.

'왜 나는 반성하지 않는가'도 반성이에요.


'논어'에서 "인이 멀리 있겠는가?

내가 인을 원하면

인이 바로 이를 것이다. " 하지요.


사랑은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고

반성은 반성을 반성하는 거예요.



10


골프 처음 배울 때.

양쪽 다리에 벽을 쌓으라 하지요.

벽이 없으면 힘을 모을 수가 없어요.


시 쓰기에서 양쪽 다리라 하면,

진정성과 언어감각일 거예요.


그러나 아무리 말재주가 뛰어나도

반성하는 정신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어요.




11


땅 주인이 자기 땅에 사는

벌레들을 무시하지요.

자기는 잠시 왔다 가지만,

그것들은 계속 살아왔고

계속 살아갈 존재들인데도 말이에요.


우리는 스스로 주인이 아니라,

하인이라 생각해야 해요.

귀한 분들의 삶이 다 그렇잖아요

예수나 마더 테레사처럼 말이에요.


'하인'이란,

'아랫사람'이라는 뜻도 있지만

'다른 사람보다 아래 서는 것'을 말해요.


다른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려면 스스로 낮은 자리에 서야 해요.


글쓰기는 오만한 우리를 전복시키는 거예요.

2017, 3,11





 

 


12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피상적인 사고밖에 안 나와요

예술은 불화에서 나와요

불화는 젊음의 특성이지요


나이 들어 좋은 글을 쓰는 건

정신이 젊다는 증거예요

젊지 않으면 쓰나 마나 한 글

써서는 안 되는 글을 쓰게 돼요


우리가 할 일은

자기와 불화하고 세상과 불화하고

오직 시하고만 화해하는 거예요

무시무시한 아름다움을 안겨다줄 거예요.




13



진정성을 가지고 뒤집으면 모든게 뒤집어 져요

이제까지 알고 있던 진실도, 거룩함도 다 뒤집어져요.

시가 안 되면, 나에게 뒤집음이 있는지 살펴보세요.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세요

간절하게 묻고, 가까운 데서 찾아보세요

난간 끝으로 뜨거운 물속으로 자기를 밀어 넣어야 해요






 

 

15


시는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건너뛴다는 말이 있지요.

산문은 골짜기를 다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방식이예요.


'백척간두 진일보' 라는 말이있지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데서, 한 발 더 내밀어야 해요.


그러면 주체와 대상 이승과 저승이 다 떨어져 나가는 걸

경험할 수 있다고 해요.

우리도 그 언저리까지는 가야 해요.



16


시는 조금 더 밀도 높은 글쓰기라고 생각하면 돼요


누가 제 시를 보고 나이에 안 맞게 뜨겁다고 하던데

제가 뜨거운게 아니라,

제가 잡고 있는 문제가 뜨거운 거겠지요.



인생은 아픔이예요

그런데 세상을 살면 아픔이 안 보여요

우리가 아픔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지요.



 

 



17


시 쓰는 건 자기 정화예요.

화장실에 볼일 보러 가듯이.

밥 먹은 다음 양치질하듯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할 일이에요

우리는 그러지 않으면

금세 지저분해지는 존재예요.




18


이란 영화감독 마흐말바프의 말이에요

"고통 없는 영화는 희망 없는 환타지다."


희망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절망의 자리에서 서 이어야 해요.


'천강성'이라는 별이

길방을 비추기 위해 흉방에 자리하듯이....


시적 글쓰기는 희생을 전제로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고통을 감당할 용기가 필요해요





19


우리는 말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말의 결과 재질을 거의  느끼지 못해요

그래서 말을 함부로 하는 거예요.


시를 쓸 때는 무언가 묻어나게 하세요

그 묻어나는 것이 사람을 아득하게 하고,

손 쓸수 없게 하고, 막막하게 해야 해요.


죽은 이의 피부처럼 아무리 눌러도

돌아오지 않는 막연함, 그 막막함에

쓰는 사람 자신이 먼저 감전돼야 해요.




 


20


글 쓰는 것 저도 피하고 싶어요.

너무 막막하잖아요.


막막하다. 할 때 이게 사막의 막자예요

어디로 가야 할 지, 얼마나 갈 수 있을지 모르는 거예요.


분명한 건, 이 막막함이 좋다는 거예요.

또는, 좋다고 받아들여야 하는 거예요.


바다 한가운데서 바라보는 막막함,

그 막막함으로 들어가면 누구나 수도자가 돼요.




21


씨앗 하나가 자랄 때

얼마나 막막하겠어요


막막함은 시작도, 끝도 막막해요,

수평선과 지평선의 막막함......


막막함은 내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

끝끝내 닿을 수 없는 것이예요.


이 막막함이 글에는 생명을 주고,

글쓰는 사람을 정화시켜요


항상 막막함을 앞에다 두세요

그러면 바르게 판단하고, 바르게 쓸 수 있어요.




 


22

 

글쓰기에는 치유의 힘이 있어요.

우리가 병들어 있음을 알게 하는 것도

또 병에서 낫게 하는 것도 모두 내러티브지요


그렇다면 이런 문장이 성립하지요.

'비유할 수 없는 것은 치유할 수 없는 것.'




23


시 쓰는 사람은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해요

'자기'라는 것도 관념일 뿐이에요.


습관과 무감각은 우리를 살게 해주지만

우리를 삶과 절연시키는 것이기도 해요

시가 고통스러운 것은 고정관념을 벗기기 때문이에요

그것은 우리 자신을 파괴하는 거예요.

2017년 3월 25일





* 두번에 걸친 수업자료 중 일부를 올렸다

올 삼월은 이런 문장들이 손을 내밀었다.

몇년 전 교수님 대학원 수업을 두고 고민한 적이 있다.

먼저 받고 있던 지인의 얘기를 듣고 지레 겁먹고 포기했었는데

지금, 인연이 닿아서 이런 책이 있어 주옥같은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시에 대한 인식과 자세를 배운다

문장, 문단 ,행간, 어휘, 어감에서도...

 

어떤 쳅터는 한참 돼새김 해야 한다.

며칠 지나도 안 되고 어떤 것은 아직도 안 읽힌다.

'불화하는 말들'은 나와 불화하라는 메세지가 가장 크다고 어제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섣불리, 무엇이든 섣불리 해서는 안된다는

긍정도 부정도 섞여 있는 말 같다

내가 어느 편에 서느냐, 서 있느냐 늘 고민하라는 얘기이기도 하겠다

아직 잘 모르지만... 여튼 그런것 같다.

나랑 불화하지 않으면 내 존재는 무감해지는 차원으로 넘어가는 걸

경계한 말이기도 한 것 같다.

그렇지만 아직 잘 모르겠다. 눈치만 조금 채어질 뿐... .).

그래도 남아 있는 진실을 위해 아무렇게나 화해하면 안된다고

 불화할 수밖에 없다고...

2017, 3,26 아침에..






'책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김혜순  (0) 2017.04.22
풍경소리/ 2017 이상문학상 작품집  (0) 2017.04.10
소중한 경험  (0) 2017.03.06
  (0) 2017.02.06
강신주  (0) 2016.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