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도시 P29
1945년 봄 미군의 항공기가 촬영한 이 도시의 영상을 보았다. 도시 동쪽에 지어진 기념관 이층의 영사실에서였다. 1944년 10월부터 육 개월 동안, 이 도시의95퍼센트가 파괴되었다고 그 필름의 자막은 말했다. 유럽에서 유일하게 나치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던 이 되시를, 1944년 9월 한 달 동안 극적으로 독일군을 몰아냈고 시민 자치가 이뤄졌던 이 도시를, 히틀러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깨끗이, 본보기로서 쓸어버리라고 명령했다.
처음 영상이 시작되었을 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도시는 마치 눈이 쌓인 것처럼 보였다. 희끗한 눈이나 얼음 위에 약간씩 그을음이 내려앉아 얼룩덜룩 더렵혀진 것 같았다.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며 도시의 모습이 가까워졌다. 눈에 덮인 것도, 얼음 위에 그을음이 내려앉은 것도 아니었다. 모든 건물이 무너지고 있었다. 돌로 된 잔해들의 흰빛 위로, 검게 불에 탄 흔적이 눈 닿는 데까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날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오래전 성이 잇었다는 공원에서 내렸다. 제법 넓은 공원 숲을 가로질러 한참 걸으니 옛 병원 견물이 나왔다. 1944년 공습으로 파괴되었던 병원을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한 뒤 미술관으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종달새와 흡사한 높은 음조로 새들이 우는, 울창한 나무들이 무수히 팔과 팔을 맞댄 소로를 따라 걸어나오며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이 한번 죽었었다. 이 나무들과 새들, 길들, 거리들, 집들과 전차들, 사람들 이 모두.
그러므로 이 도시에는 칠십 년 이상 된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구시가의 성곽들과 화려한 궁전, 시 외곽에 있는 왕들의 여름 호숫가 여름 별장 모두 가짜다. 사진과 그림과 지도에 의지해 끈질기게 복원한 새것이다. 간혹 어떤 기둥이나 벽들의 아랫부분이 살아남았을 경우에는, 그 옆과 위로 새 기둥과 새 벽이 연결되어 있다. 오래된 아랫부분과 새것인 윗부분을 분할하는 경계, 파괴를 증언하는 선들이 도드라지게 노출되어 있다.
그 사람에 대해 처음 생각한 것은 그날이었다.
이 도시와 같은 운명을 가진 어떤 사람, 한차례 죽었거나 파괴되었던 사람. 그을린 잔해들 위에 끈덕지게 스스로 복원하 사람. 그래서 아직 새것인 사람. 더던 기둥, 어떤 석벽들이 아랫부분이 살아남아, 그 위에 덧쌓은 선명한 새것과 연결된 이상한 무늬를 가지게 된 사람.
-흰 도시 중에서.
'흰'은 2014년 한강 작가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4개월간 보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흰것들에 대한 상념.
강보 배내옷 소금 눈 얼음 달 쌀 파도 백목련 흰새 하얗게 웃다 백지 흰 개 백발 수의......
삶과 죽음, 연결되어 있는 이생 지금에 대한 이야기다.
지금 내가 선 이도시 이 곳이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로 연결되어 있음을
놓지 않고 가지고 가는 작가의 집중력이 '흰'것을 모티브로 이야기 되고 있다.
산문 같기도 하고 시산문 같기도 한 문장들이다.
쳅터가
1-너
2-그녀
3- 모든 흰
세부분이고, 65편의 흰것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읽다보면 암울해서 검은 색과 더 어울리는 이야기들이 더 많다.
아프지만 상처난 그 부위에 흰것을 채색하고 싶어하는 화자
더러워지기 싶지만 그래도 흰것에 대한 작가의 역량이 놀랍다.
폐허에 세원진 도시 폴란드 바르샤바
그곳 어느 공원에서 그녀는 새로 세워진 도시의 모습속에서 옛 흔적을 읽어낸다.
우리 삶도 다른이의 죽음 위에 세워진 것 동일한 근원에 대한 인식.
내 생명으로 이어진 인류의 어떤 연결성,
연대 그런 것이 읽힌다.
그 사람에 대해 처음 생각한 것은 그날이었다.
이 도시와 같은 운명을 가진 어떤 사람, 한차례 죽었거나 파괴되었던 사람. 그을린 잔해들 위에 끈덕지게 스스로 복원하 사람. 그래서 아직 새것인 사람. 더던 기둥, 어떤 석벽들이 아랫부분이 살아남아, 그 위에 덧쌓은 선명한 새것과 연결된 이상한 무늬를 가지게 된 사람.
흰 도시의 마지막 문단을 다시 본다
여기서 그 사람이라고 지칭했지만 '그 사람'은
수 많은 나이기도 하고 너이기도 하고
우리이기도 하다.
빛이 있는 쪽 p35
이 도시의 유태인 게토에서 여섯 살에 죽은 친형의 혼과 함께 평생을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남자의 실화를 읽었다. 분명히 비현실적인 이야기인데, 그렇게 일축하기 어려운 진지한 어조로 씌어진 글이었다. 형상도 감촉도 없이 한 아이의 목소리가 시시로 그에게 찾아왔다.
**유태인게토!
게토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알았다.
독일군이 폴란드를 점령하고 바르샤바에 유태인 게토를 만들었고,
거기에 수용된 유태인들은 질병과 물자부족, 식량부족, 강제노동에 시달렸다고 한다.
독일은 1942년 부터 본격적인 유태인 말상정책을 시작했고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들을 이송하여 처형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인종을 분리하고 처형하기 위해서 게토를 만든 셈이다.
그는 벨기에인 가정에 입양되어 자랐기 때문에 이 나라의 언어를 전혀 몰랐으며, 자신에게 형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따라서 모든 것이 운 나쁘게 반복되는 자각몽이거나 착란증상이라고만 생각했다.
자신의 가족사를 뒤늦게 알게 된 열여덟 살에, 그는 아직도 찾아오는 그 혼을 이해하기 위해 이 나라의 언어를 공부했다. 어린 형이 지금까지도 겁에 질려 있다는 것을 그렇게 알았다. 군에게 체포되기 직전 내 뱉었던, 공포에 휩싸인 몇 마디 말을 반복해서 외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문학적 장치이든 팩트든
위 이야기는 죽은 형의 혼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서
폴란드 말을 배우는 동생이 그 소리를 듣고보니
어린 형이 공포에 질려 군에 체포되기직전에 내 뱉었던
몇마디 말을 반복적으로 외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여기 '흰' 소설을 관통하는 이야기는 화자와
화자보다 먼저 태어나서 죽은 언니의 이야기다
배내옷P21
내 어머니가 낳은 첫 아기는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었다고 했다.
달떡처럼 얼굴이 흰 여자아이였다고 했다.
여덟달 만의 조산이라 몸이 아주 작았지만 눈코입이 또렷하고 예뻤다고 했다.
까만 눈을 뜨고 어머니의 얼굴 쪽을 바라보던 순간을 잊을 수 엇다고 했다.
배내옷이 수의가 되어버린 언니이야기
엄마가 8개월만에 갑자기 혼자서 한 출산과 그 환경에 대한 이야기..
화자가 자신도 외면해 두었던 먼저 태어났지만
죽은 언니에 대한 이야기를 끌어오고 있다.
결국 타살되었을 여섯 살배기 아이의 최후를 상상하고 싶지 않아, 그 이야기를 읽은 뒤 여러날 잠을 설쳤다. 그러던 어느 새벽, 마침내 마음이 고요해졌을 때 생각했다. 태어나 두 시간 동안 살아 있었다는 어머니의 첫 아기가 만일 나를 이따금 찾아와 함께 있었다면, 나로서는 그걸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이에게는 언어를 배운 시간이 없었으니까, 한 시간 동안 눈을 열고 어머니 쪽을 바라보았다고 했지만 , 아직 시신경이 끼어나지 않아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오직 목소리만을 들었을 것이다. 죽지 마. 죽지마라 제발. 알아들을 수 없었을 그 말이 그이가 들은 유일한 음성이었을 것이다.
이문장을 처음 읽을 때는 몰랐다.
그냥 벌로 읽었다.
그리고 몇번 반복해서 읽었고
지금 리뷰를 쓰려고 다시 되새김하는 동안
눈물이 흘러내린다
세상에서 가장 여리고 순한것 그 순명한 것을 떠나보내는.......
"죽지 마, 죽지마라 제발..."
말고는 스물세살의 엄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위로를 받으려면 받을 수 있다면
혼도 너무 어렸던 혼은 얼마나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볼줄 알고 들을 줄 알아야 혼도 위로 받을 수 있을까
죽은 형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모국어를 다시 배운 동생처럼..
.
그러나 확언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다. 그이가 나에게 때로 찾아왔었는지. 잠시 내 이마와 눈언저리에 머물렀었는지. 어린 시절 내가 느낀 어떤 감각과 막연한 감정 가운데, 모르는 사이 그이로부터 건너온 것들이 있었는지. 어둑한 방에 누워 추위를 느끼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니까. 죽지마. 죽지마라 제발. 해독할 수 없는 사랑과 고통의 목소리를 향해, 희끗한 빛과 체온이 있는 쪽을 향해 어둠속에서 나도 그렇게 눈을 뜨고 바라봤던 건지도 모른다.
작가 의식이 보이는 문장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 외엔 관심없고 짐작 않는 편이다.
확언할 수도 부인 할 수도 없는 일이 얼마나 많았고
놓친 것들도 얼마나 많을까.
혼자이지만 혼자이지 않은 시간들이 있었고
함께였지만 처절하게 혼자였던 시간도 있었다.
곁에 있어 더 외로운 시간도 있었고
함께 하지 못해서 갈증나는 시간도 있었다.
'빛이 있는 쪽'이라 붙인 제목도 좋다.
밤에 거실에 목이말라서 나오면 주방 스위치 아래 형광 선이 흰 빛을 내고 있다.
(우리 집에 처음 온 사람들이 밤에 저 빛의 도움을 받을 것이다)
내가 이쪽에서 스위치를 올리는 순간 그 빛은 사라진다.
그리고 물을 마시고 다시 불을 끄고 들어가면서 빛이 있었던 쪽을
나는 다시 본다.
아까 보였던 그 빛은 흔적도 없다.
큰 빛이 그 작은 빛을 삼킨것처럼
다시 물을 마시러 나오면
그 빛은 사라진 것이 아니고 거기 있는데
왜 불을 끈 금방은 아 보이는지
어둠이 공간을 다 잠식하고 난 다음에야 슬며시 빛을 내는지...
빛은 어둠속에서만 빛나고
빛은 빛속에서는 빛이 지나간 뒤에는 빛을 발하지 못하는가 그런 생각도 든다.
새벽마다 느끼는 빛에 대한 신비로운 경험이다.
젖
스물세 살 난 여자가 혼자 방에 누워 있다. 첫서리가 녹지 않은 토요일 아침, 스물여섯 살 난 남편은 어제 태어났던 아기를 묻으러 삽을 들고 뒷산으로 갔다. 붓기 때문에 여자의 눈이 잘 떠지지 않는다. 몸 구석구석의 관절이, 부어오른 손가락 마디들이 아리다. 한순간 처음으로 여자의 가슴이 화해진다. 여자가 몸을 일으켜 앉아 서툴게 젖을 짜본다. 처음에는 묽고 노르스름한 젖이, 그다음부터 하얀 젖이 흘러나온다. P37
태어난지 두시간 만에 죽은 첫 애
그리고 낳은 남자아이가 또 죽은 뒤, 화자가 태어났다.
엄마는 그 아이가 살았다면
너는 낳지 않았을 거라는 얘기를 했다.
평생 첫아이에 대한 아픔을 가슴에 묻고 살아간 엄마는
은연중에 자신의 아픔이 딸에게도 전이된 것이다.
어린 화자가 언니 얘기를 들으면서 자라며 은연중
언니에 대한 어떤 연대감을 가지고 자란것 같다.
화자의 언니에 대한 마음은 어떤 것인지
당신의 눈
당신의 눈으로 바라볼 때 나는 다르게 보였다. 당신의 몸으로 걸을 때 나는 다르게 걸었다. 나는 당신에게 깨끗한 걸 보여주고 싶었다. 잔혹함, 슬픔, 절망, 더러움, 고통보다 먼저, 당신에게만은 깨끗한 것을 먼저. 그러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종종 캄캄하고 깊은 거울 속에서 형상을 찾듯 당신의 눈을 들여다봤다.
그때 그 외딴 사택이 아니라 도시에 살았더라면, 어머니는 성장기의 나에게 말하곤 했다.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갈 수 있었더라면. 당시 막 도입되었던 인큐베이터에 그 달떡 같은 아기를 넣었더라면.
그렇게 당신이 숨을 멈추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결국 내가 태어나지 않게 된 나 대신 지금까지 살아 주었다면. 당신의 눈과 당신이 몸으로 , 어두운 거울을 등지고 힘껏 나아가 주었다면. P118
어떤 대상에 대한 마음(사랑이든 안타까움이든)이
다른 대상을 밀어내는 일이 되기도 한다.
어머니가 화자즐 두고 첫 아이를 그리워할수록 어린 마음은 어땠을까
자신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일
그리고 그 얘기들을 들으면서 자라는 일.
그래도 이 작품속 화자는 언니였던 그녀의 눈으로 살기도 한다.
자신이면서 자신이 아닌 삶을 산다.
'당신의 눈'이라는 위 문장은 당신의 몸으로도 살고
내 몸으로도 사는
당신의 눈으로도 보고
내 눈으로도 보는 삶의 애기가 뒤섞여 있다.
그녀
그 아기가 살아남아 그 젖을 먹었다고 생각한다.
악착같이 숨을 쉬며, 입술을 움직이려 젖을 빨았다고 생각한다. 젖을 떼고 쌀죽과 밥을 먹으며 성장하는 동안, 그리고 한 여자가 된 뒤에도, 여러번 위기를 겪었으나 그때마다 되살아났다고 생각한다.
죽음이 매번 그녀를 비껴갔다고, 또는 그녀가 매번 죽음을 등지고 앞으로 나아갔다고 생각한다.
죽지마, 죽지 마라 제발.
그 말이 그녀의 몸속에 부적으로 새겨져 있으므로.
그리하여 그녀가 나 대신 이곳으로 왔다고 생각한다.
이상하리만큼 친숙한, 자신의 삶과 죽음을 닮은 도시로. p38
화자와 엄마의 감정이 섞인 문장이다
때로 엄마에게 언니였을 화자 또한 가끔 아주 가끔
자신의 언니가 자기 속에 함께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내기도 했으리라
그리고 외면했던 시간들은 언니에게 또는 엄마에게 죄스런 어떤 마음으로 남기도 했으리라.
혼이나 영적세계에 대해서 그럴수도 있을거라고 염려하거나 짐작하며 살 수도 있겠다.
상황이나 여건이 우리가 가늠하지도 못하는 경우
그런 불가사의한 일들은 있기 마련이고
다만 내가 그래도 모르겠는 것들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편이 나으리라.
백목련
스물다섯, 스물 네 살의 대학 동기 둘이 비슷한 시기에 죽었다. 버스 전복 사고와 군부대 사고로, 이듬해 이른 봄 같은 학번 졸업생들은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만들어, 문학 수업을 듣던 강의실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어린 백목련 두 그루를 심었다.
여러 해 뒤 그 생명- 재생- 부활의 꽃나무들 아래를 지나다 그녀는 생각했다. 그때 왜 우리는 하필 백목련을 골랐을까. 흰 꽃은 생명과 연결되어 있는 걸까. 아니면 죽음과? 인도유럽어에서 텅 빔(blank) 과 흰빛(blanc), 검음(black)과 불꽃(flame),이 모두 같은 어원을 갖는다고 그녀는 읽었다. 어둠을 안고 타오르는 텅 빈 흰 불꽃들 - 그것이 삼월에 짧게 꽃피는 백목련 두 그루인 걸까? p81
넋
넋이 존재한다면, 그 보이지 않는 움직임은 바로 그 나비를 닮았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해왔다.
그렇다면 이 도시의 혼들은 자신들이 총살된 벽 앞에 이따금 날아들어, 그렇게 소리 없는 움직임으로 파닥이며 머무르곤 할까? 그러나 이 도시의 사람들이 그 벽 앞에 초를 밝히고 꽃을 바치는 것이 넋을 위한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안다. 살육당했던 것은 수치가 아니라고 믿는 것이다. 가능한 한 오래 애도를 연장하려 하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두고 온 고국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했고, 죽은 자들이 온전히 받지 못한 애도에 대해 생각했다. 그넋들이 이곳에서처럼 거리 한복판에서 기려질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고, 자신의 고국이 단 한번도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P109
이 책은 독서토론 모임에서 2월 첫째주에 토론한 책이다.
토론에서는 다양한 얘기들이 나왔고,
특이 이 쳅터에 대한 고찰이 인상깊었다.
몇가지 얘기들을 여기다 올려본다
.
.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어디인가?
작가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 같기도 하다"
나로 살지만 언니로 산 자신을 보는 것'에 대한 얘기
실재 한강 작가의 언니가 죽었으므로 매우 자전적이고
그 무거움을 이번 소설을 통해 덜어내는 시간 아니었을까
.
광주에서 십여년 살았다는 회원이 전해준 말
"광주에는 5월에 축제가 없다"
슬프고 우울한 문장이지만 계속 삶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다
또 광주에서 산적 있었다는 다른 회원
"광주 시민들은 잘못한 거 없는 데 상처만 받고 있다"
"경상도에 사람들 홍어 냄새가 난다는 등 적대적 정서 많은 것 같다"
또 한 회원은 문장이 은유적이라고...
.
이 외에도 두시간 동안 나눈 토론에선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다.
작가의 역량에 놀랐다는 얘기가 많았다.
작년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받으며 알려졌지만
정작 '채식주의자'는 쓴지가 9년 정도 지난 뒤 받은 상이라서 작가는 좀 적응이 안된다고 했다.
수상 소감겸 그 즈음의 기분을 물었을 때 빨리 내 방으로 들어가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이후 '소년이 온다' 는 광주 얘기다.
폴란드 바르샤바가 우리 도시와 다른점에 대한 얘기도 있었다.
우리 같으면 싹 밀어버리고 다시 세웠을 건물에 대한 통찰도 재밌었다.
뒤 돌아 볼 줄 모르고 살아온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회원도 있었다.
그녀는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보람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여겨도 충분히 좋았는데
스스로 어느 한주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 봤는데
행복했다고 했다.
또 한 회원은 '소년이 온다'를 반드시 읽어보라고 강권햇다.
'흰'보다 더 좋다고
나도 사놓고 보다가 덮어놓은 책인데 이참에 다시 보려한다.
언니
언니가 있었다면, 생각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나보다 꼭 한 뼘 키가 큰 언니, 보풀이 약간 일어난 스웨터와 아주 조금 상처가 난 에나멜 단화를 물려주는 언니,
엄마가 아플 때면 코트를 걸치고 약국에 다녀오는 언니, 쉬, 조용조용히 걸어야지. 자신의 입술에 집게 손가락을 대며 나무라는 언니, 이건 아주간단한 거야, 쉽게 생각해봐, 내 수학문제집 여백에 방정식을 적어가는 언니, 얼른 암산을 하려고 찌푸려진 이마,
발바닥에 가시가 박힌 나에게 앉아보라고 하는 언니, 스탠드를 가져와 내 발 언저리를 밝히고, 가스레인지 불꽃에 그슬려 소독한 바늘로 조심조심 가시를 빼내는 언니.
어둠 속에 웅크려 앉은 나에게 다가오는 언니. 그만 좀해, 네가 오해한 거라니까, 짧고 어색한 포옹, 제발 일어나, 밥부터 먹자, 내 얼굴을 스치는 차가운 손, 빠르게 내 어깨에서 빠져나가느 그녀의 어깨. P122
그제 볼일 있어 나간 길 이었는데
가로수 은행나무가 전지되고 있었다
모지락 스럽게 베어나가고 있었다
그 길을 돌아오면서 든 생각은
저것이 매년 저렇게 크게 잘려 나가서
몸통이 커진 것이라는 생각에 닿았다.
작년에 잎이 났던 가지들 사라졌어도
작년과 같은 모습으로 여전할것이다
올해 어느날
나는 또 이거리에서 차를 세우고 은행나무를 담을 것이다
매년 그래왔듯이
이 책 흰이 말하는 것도 그런 것 아닐까.
희거나 검은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는 살아가고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
모든 흰
당신의 눈으로 흰 배춧속 가장 깊고 환한 곳, 가장 귀하게 숨겨진 어린 잎사귀를 볼 것이다.
낮에 뜬 반달의 서늘함을 볼 것이다.
언젠가 빙하를 볼 것이다. 각진 굴곡마다 푸르스름한 그늘이 진 거대한 얼음을, 생명이었던 적이 없어 더 신성한 생명처럼 느껴지는 그것을 올려다볼 것이다.
자작나무 숲의 침묵 속에서 당신을 볼 것이다. 겨울 해가 드는 창의 정적 속에서 볼 것이다. 비스듬히 천장에 비춰진 광선을 따라 흔들리는, 빛나는 먼지 분말들 속에서 볼 것이다.
그 흰, 모든 흰 것들 속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쉰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 P129
마지막 문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