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수필

저녁 여섯시

구름뜰 2017. 5. 8. 19:37

 

1

네가 한 풍경을 바꾸는 동안

나는 액자 속과 탁자에도 있었고

걸레 빤 물과 먼지들 속에도 있었다

 

하루가 제 얼굴을 부비는 시간,

봄 들녘, 타오르던 아지랑이 하마 저물어 식고

놀던 동네 아이들, 배고파 앞이 캄캄해지는 시간

강변마을 해사한 흰 꽃들이

조용히 입 다무는 때

 

저녁 여섯시가 내게도 와 주다니!

나 뒤늦게 행복해도 되는가, 내 안에 너는

고요하고 지극하게 들끓는다

 

 

2

갯버들 보드라운 솜털에 입 맞추며

저녁의 안부를 묻는다

여리고 상처받기 쉬운 마음이란 것

너도 갖고 있었구나

아, 눈물겨운 것아

 

벚꽃 천지에서의 화사한 하루,

봄날의 나른한 비애로 얼룩진 꽃구름 아래

평화는 적막하여서야 비로소 내 것이구나,

삶의 신자 되지 않는 것 없구나!

 

 

3

서쪽 하늘 비껴가는 흰 죽지 새 한마리가

‘크나큰 긍정’을 가르쳐 준다

슬픔 없는 존재란 없는 것이라고……

 

저녁 여섯시는 흐린 하늘에도 길 있음을 보여준다

 

4

산비둘기가 가장 슬픈 족속이다

비 맞는 숲의 오래 된 적막을

낮고 구슬픈 흐느낌으로 깨뜨린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는 게

슬픔에도 힘줄이 있다면 그러하리라

 

꿩 울음소리에는 깊은 숲의 울림이 깃들었다

그 울림의 심연을 여섯시가 지나간다

ㅡ엄원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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