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수필

낯선곳 외 3편

구름뜰 2018. 12. 21. 08:56

 

낯선 곳/고은


떠나라

낯선 곳으로


아메리카가 아니라

인도네시아가 아니라

그대 하루하루의 반복으로 부터

단 한번도 용서할 수 없은 습관으로 부터

그대 떠나라


아기가 만들어낸 말의 새로움으로

할머니를 알루빠라고 하는 새로움으로

그리하여 할머니조차 새로움이 되는 곳

그 낯선 곳으로


떠나라

그대 온갖 추억과 사전을 버리고

빈 주먹조차 버리고


떠나라

떠나는 것이야말로

그대의 재생을 뛰어넘어

최초의 탄생이다 떠나라



 

안동 숙맥 박종규/안상학


신문 지국을 하는 그와 칼국수 한 그릇 할 요량으로 약속 시간 맞춰 국숫집 뒷방 조용한 곳에 자리 잡고 터억하니 두 그릇 든든하게 시켜놓고 기다렸는데 금방 온다던 사람은 오지 않고 국수는 퉁퉁 불어 떡이 되도록 제사만 지내고 있는 내 꼴을 때마침 배달 다녀온 그 집 아들이 보고는 혹 누구누구를 만나러 오지 않았냐고 은근히 물어오길래 고개를 끄덕였더니만 홀에 한 번 나가보라고는 묘한 미소를 흘리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 마당을 지나 홀 안을 빼꼼 들여다보니 아연하게도 낯익은 화상이 또한 국수를 두 그릇 앞에 두고 자꾸만 시계를 힐끔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숙맥의 원뜻은 콩과 보리를 구분못한다는 순진함을 비유한다고 한다. '숙맥이 상팔자'라는 말도 있고. '그는 세상물정 모르는 숙맥이다'. 이런 말도 있다고. 이 시에 나오는 안상학과 박종규의 숙맥!스러움은 거울 같아서  언제 읽어도 훈훊핟. 이미지도 선명해서 좋다.   

  

* 차 시간을 잘 못 확인한 지인이 전화했다면 5분도 기다릴 필요가 없는 걸 알면서도, 일찍 도착해서한시간을  기다렸다는 걸 알았을 때 그때 그 한시간은 그의 이미지로 남았다. 함께한 시간처럼 선명한 그의 이미지가 되었다. 그는 모를테지만 그 시간은 내게서 발효 숙성 되었습니다. 편지를 쓰고 우체국으로 가고 우체부 아저씨를 거쳐서 내게 오는 시간처럼. 설 익은 말이나 글은 아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발효된 마음까지야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불을것이 확실한 국수보다 더 신뢰가 가는 사람. 오늘 그런 숙맥같은 사람과 허기채우듯 무어라고 같이 하고 싶다. 


국수가 먹고 싶다/ 이상국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 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을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이상국

 


**마음이 편애나 편견으로 기울 때 말하자면 평정을 잃고 싶을 때가 있다

머물다 갔으면 싶은  바람이 스쳐갈때가 그렇고, 외면한 갈망이 아직 내 것일 때도 그렇다.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사람,정신이 몸의 허기처럼 꼬르륵 거릴 때



루룩 국숫발처럼 단숨에 들이켜지는 그리움을 채우고 싶다.









 


경이로움/쉼보르스카


무엇 때문에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이 한사람인 걸까요?

나머지 다른 이들 다 체져두고 오직 이 사람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요?

수많은 날들 가운데 하필이면 화요일에?

새들의 둥지가 아닌 사람의 집에서?

비늘이 아닌 피부로 숨을 쉬면서?

잎사귀가 아니라 얼굴의 거죽을 덮어쓰고서?


어째서 내 생은 한번뿐인 걸까요?


무슨 이유로 바로 여기, 지구에 착륙한 걸까요? 이 작은 혹성에?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나 여기에 없었던 걸까요?

모든 시간을 가로질러 왜 하필 지금일까요?

모든 수평선을 뛰어넘어 어째서 여기까지 왔을까요?

무엇 때문에 천인도 아니로, 강장동물도 아니고, 해조류도 아닌 걸까요?

무슨 사연으로 단단한 뼈와 뜨거운 피를 가졌을까요?


나 자신을 나로 채운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왜 하필 어제도 아니고, 백 년 전도 아닌 바로 지금

왜 하필 옆 자리도 아니고, 지구 반대편도 아닌 바로 이곳에 앉아서

어두운 구석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영원히 끝나지 않을 독백을 읊조리고 있는 걸까요?

마치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으르렁대는 성난 강아지처럼


*어제 있었던 시 수업에서 추천시로 올라왔던 시! 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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