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수필

구름뜰 2019. 5. 1. 07:42

 

 

사태가 났다

무너져 내린 단풍의 잔해로

욱수골 저수지 가는 길이 막혔다

붉은색이 엷어져 가는 세월이었다

당신과 나눈 말들이 몇 번 피고 졌는지

옹이로 갈라진 내 몸피를 보면 알 수 있을는지,

물의 냄새에는 여태 지워지지 않는 마음이 있다

저장고의 시간은 묵은 화약처럼 푸슬푸슬 흘러내린다

저수지 가는 길, 검붉게 찍힌다

 

짙은 색들은 서로를 온전히 담지 못한다

계절이 만나는 둑길, 겹쳐진 색 한가운데에 서서

나는 방금 바람이 복원한 파랑을 내려다본다

경사의 마음에 희미한 목소리들이 찰랑거린다

내 몸의 낡은 색들이 물에 풀려 간다

 

시간은 색이다, 아주 오래 전

당신이 짙어지면서 내 몸은 묽어져 갔다

내 몸이 그린 곳곳에 당신의 바탕색이 있었다

계절마다 다른 색으로 묻어나면서 나는 이제

채도와 명도가 너무 낮은 색,

어느덧 저수지에 또 다른 색이 어린다

무너져 내린 단풍이 여기까지 밀려온 것일까

거기 초록의 웃음 하나가 하얀 미소에 스며드는 걸

본다, 내가 물들었던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내 온몸을 다 그려도 아깝지 않았던 색, 당신

ㅡ심강우

 

 

*욱수골 : 대구 시지 욱수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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