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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핀다는 것

구름뜰 2020. 4. 21. 08:30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전해 오는 향기가 황홀하다. 겨우내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주는 매화가 피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있다는 걸 모를 만큼 존재감 없는 산수유도 피었다. 여느 꽃들처럼 화려하진 않아도 봄소식을 전해 오는 반가운 꽃이다. 곧이어 개나리가 기세등등하게 피어나고 진달래도 수줍게 따라 핀다. 살구꽃이 벚꽃에 질까 봐 서둘러 피어나고 수많은 등불을 매단 목련도 핀다. 그도 잠시. 중력을 이기지 못해 떨어지는 꽃잎은 봄의 여왕 벚꽃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벚꽃이 날리며 드러낸 속살엔 어느새 연두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봄에 피는 꽃들은 잎보다는 꽃이 먼저 핀다. 무에 그리 급한 건지. 번잡함을 피하려 부지런을 떠는 얼리버드 작전일까. 사실 이른 봄에 피는 꽃은 한 해 전 여름에 미리 만들어 겨우내 간직한 꽃눈을 봄 햇살에 펼쳐 보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동시에 그것을 꺼내 놓지 않는다. 마치 자신이 가장 주목받을 순간을 포착하려는 듯 간격을 두고 기회를 기다린다. 덕분에 봄날의 정원에선 그들의 순서를 따라가는 두 눈이 바빠진다.

 

꽃이 피는 건 기온이 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여도 꽃이 따뜻해진다고 무조건 피는 건 아니다. 겨울을 나는 식물은 일정량의 추위를 견디고 또 어느 정도의 온기를 쌓아야 꽃을 피울 수 있다. 일시적으로 기온이 올랐다고 섣불리 꽃을 피우다간 낭패를 보기 십상이기에 누적된 온도를 근거로 꽃피는 시기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환경에 적응해 온 그들의 오랜 생존 전략일 듯하다. 식물의 저온요구량과 고온요구량은 종마다 다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봄에 벚꽃보다는 개나리나 진달래를 먼저 보는 것이다. 그러나 기후온난화로 개나리에서 벚꽃을 볼 수 있는 기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 4월에나 피던 벚꽃은 개나리가 피고 대략 열흘 뒤인 3월 말이면 이곳에서 볼 수 있다.

 

꽃이 피는 데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요인은 낮과 밤의 상대적인 길이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춘분을 지나면 낮이 조금씩 길어져 퇴근 무렵에도 밖이 훤하다. 집으로 그냥 들어가기에는 아까운 시간인 듯싶어 지인들과의 저녁 모임을 계획할 수도 있지만 다음 날을 생각하면 집으로 들어가는 편이 좋겠다는 고민을 하게 되는 때다. 낮의 길이에 영향을 받는 꽃들이 있다. 낮의 길이가 길어질 때 꽃을 피우는 식물은 카네이션, 붓꽃, 해바라기 같은 장일식물이다. 반면 낮의 길이가 짧아질 때 꽃을 피우는 식물은 가을에 볼 수 있는 국화와 코스모스 같은 단일식물이다.

 

장일식물과 단일식물의 특징은 인간의 성향과 유사한 점이 있다. 사람도 외향적인 사람과 내향적인 사람이 있듯 말이다. 외향성이 강한 이들은 다른 사람을 만나 웃고 떠드는 가운데 에너지를 얻는다. 낮이 길고 밤이 짧아야 꽃을 피우는 장일식물의 특성과 비슷하다.

 

반면 내향성이 큰 사람들은 홀로 있는 자기만의 시간이 길어야 생산적이 된다. 낮이 짧고 밤이 길어야 꽃을 피우는 단일식물과 닮았다. 그런데 만일 낮이 짧고 밤이 긴 단일 조건에서 꽃을 피워야 할 단일식물에게 밤에 잠시 빛을 비추면 꽃이 피지 않는다. 홀로 있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할 내향적인 사람들이 그들만의 시간을 방해받으면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과 비슷하다. 또한 만일 단일 조건에서 꽃을 피우지 않는 장일식물에게 밤에 일시적으로 빛을 비추면 꽃이 핀다. 이는 밤에도 다른 사람들을 만나 반짝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외향적인 사람들과 닮았다.

 

빛과 온도, 혹은 강수량으로 꽃이 피는 신호를 식물에게 알리는 일은 단순하지 않은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 빛에 의해 활성화된 광수용체가 플로리겐이라는 개화 호르몬을 만들어 꽃을 피우기까지의 과정은 여러 단계를 거치며 그에 대한 연구가 그 비밀스러운 세계를 아주 조금씩 들춰내고 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라는 시의 구절은 괜한 말이 아니었다. 어디 소쩍새 울음과 천둥소리뿐일까. 한 줌의 바람과 햇살 그리고 한 줄기 소나기까지.

 

백일 동안의 고민과 한숨 그리고 뒤척임과 잠 못 이룸까지. 꽃이 핀다는 건 화려하고 폼 나지 않는 이름 모를 꽃이라도 주어진 삶의 소명을 다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애틋한 증거인 것이다.

ㅡ백옥경 구미과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