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수필

해거리

구름뜰 2023. 11. 3. 20:14


그해 가을이 다숩게 익어가도
우리 집 감나무는 허전했다
이웃집엔 발갛게 익은 감들이
가지가 휘어질 듯 탐스러운데

학교에 다녀온 허기진 나는
밭일하는 어머님을 찾아가 징징거렸다
왜 우리 감나무만 감이 안 열란 당가

응 해거리하는 중이란다
감나무도 산목숨이어서
작년에 뿌리가 너무 힘을 많이 써부러서
올해는 꽃도 열매도 피우지 않고
시방 뿌리 힘을 키우는 중이란다
해걸이 할 땐 위를 쳐다보지 말고
발아래를 쳐다봐야 하는 법이란다

그해 가을이 다 가도록 나는
위를 쳐다보며 더는 징징 대지 않았다
땅속의 뿌리가 들으라고 나무 밑에
엎드려서
나무야 심 내라 나무야 심 내라
땅심이 들어라 땅심이 들어라
배고픈 만큼 소리치곤 했다

어머님은 가을걷이를 마치신 후
감나무 주위를 파고 퇴비를 묻어주며 성호를 그으셨다

꽃과 열매를 보려거든 먼저
허리 굽혀 땅심과 뿌리를 보살펴야 하는 거라며

정직하게 해거리를 잘 사는 게
미래의 희망을 키우는 유일한 길이라며
ㅡ 박노해



* 해거리를 기다려주는 일
해산한 산모에게 보내는 정서 같다.

너는 언제였는지
내 빈가지는 한 해로 모자랐는데

남들이 빈 가지만 쳐다보는데도
의연하게 해거리를 선택할 줄 아는 나무 아름다운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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