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수필 762

허(虛)의 여유

문으로 들어온 것은 집안의 보배라 생각지 말라"는 말이있다. 바깥 소리에 팔리다 보면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바깥의 지식과 정보에 의존하면 인간 그 자체가 시들어 간다. 오늘 우리들은 어디서나 과밀 속에서 과식하고 있다. 생활의 여백이 없다. 실(實)로써 가득 채우려만 하지, 허(虛)의 여유를 두려고 하지 않는다. 삶은 놀라움이요, 신비이다. 인생만이 삶이 아니라 새와 꽃들, 나무와 강물, 별과 바람, 흙과 돌, 이 모두가 삶이다. 우주 전체의 조화가 곧 삶이요. 생명의 신비이다. 삶은 참으로 기막히게 아름다운 것, 누가 이런 삶을 가로막을 수 있겠는가. 그 어떤 제도가 이 생명의 신비를 억압할 수 있단 말인가. 하루해가 자기의 할 일을 다하고 넘어가듯이 우리도 언젠가는 이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시와 수필 2023.12.30

정말 부드럽다는 건

토마토를 구워보면 구울수록 더 부드러워져서는 눈물이 많아져요 구운 토마토를 당신에게 주고 싶어요 이후의 모습들은 저렇게 무른 모습이 좋겠어요 생각들이 뜨거워지고 제 소리를 제가 알지 못하고 당신은 가방을 메고 종일 먼 곳을 헤매니 구운 토마토를 먹으면 눈가가 붉어져서는 문득 오래전 잊고 있던 내용을 돌아다볼 듯해요 제 안의 독소를 빼내주시니 우리, 단단함에 대해 적을 것이 아니라 하염없이 무너지도록 힘쓸 일이 없도록 아침엔 토마토를 구워요 당신을 당신 바깥으로 놓아보아요 ㅡ 이규리 * '당신을 당신 바깥으로 놓아보아요' 이렇게 부드러운 문장이 또 있을까. 삶의 한계라면 언제나 내 안에서만 사는 일일 것이다. 그러다 아주 잠깐 나를 잊는 시간을 경험할 때 대자유를 경험한다. 그건 대상에 대한 몰입이기도 하..

시와 수필 2023.12.22

안개의 나라

안개의 나라 언제나 안개가 짙은 안개의 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안갯속에 사노라면 안개에 익숙해져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그러므로 보려고 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귀는 자꾸 커진다 하얀 안개의 귀를 가진 토끼 같은 사람들이 안개의 나라에 산다 (김광규·시인, 1941-) 피어라 안개 밤마다 뒤척이는 잠의 머리맡에 그대 있어 두물머리에 섰다 남과 북 갈래를 버리고 하나 된 강에 하얗게 물안개 핀다 피어라 안개 뭍과 물 산과 강 경계를 지우고 남과 여 너와 나 분별도 버리고 피어라 피어라 안개 아무것도 아니기에 모든 것이기도 한 안개의 다른 이름은 스밈 안개가 겹으로 겹으로 피었다 그대에게 ..

시와 수필 2023.12.10

해거리

그해 가을이 다숩게 익어가도 우리 집 감나무는 허전했다 이웃집엔 발갛게 익은 감들이 가지가 휘어질 듯 탐스러운데 학교에 다녀온 허기진 나는 밭일하는 어머님을 찾아가 징징거렸다 왜 우리 감나무만 감이 안 열란 당가 응 해거리하는 중이란다 감나무도 산목숨이어서 작년에 뿌리가 너무 힘을 많이 써부러서 올해는 꽃도 열매도 피우지 않고 시방 뿌리 힘을 키우는 중이란다 해걸이 할 땐 위를 쳐다보지 말고 발아래를 쳐다봐야 하는 법이란다 그해 가을이 다 가도록 나는 위를 쳐다보며 더는 징징 대지 않았다 땅속의 뿌리가 들으라고 나무 밑에 엎드려서 나무야 심 내라 나무야 심 내라 땅심이 들어라 땅심이 들어라 배고픈 만큼 소리치곤 했다 어머님은 가을걷이를 마치신 후 감나무 주위를 파고 퇴비를 묻어주며 성호를 그으셨다 꽃과 ..

시와 수필 2023.11.03

고백

좋은 것만 보면 무어든 네 생각이 나고 어여쁜 경치 앞에서도 네 얼굴이 떠올라 어떻게든 너에게 선물하고 싶지만 번번이 그럴 수는 없어 안달하다가 무너져 내리다가 절벽이 되고 산이 되고 끝내는 화닥화닥 불길로 타오르는 꽃나무 이것이 요즘 너를 향한 나의 마음이란다 ㅡ나태주 * 마당을 거닐다가 감나무를 보다가 개망초를 보다가 꽃에 찾아든 벌을 보다가 잠시 꽃이었다가 벌이었다가 밤이 깊었나 보다 옛 달처럼 고향의 밤은 무심하게도 흐르고 풀벌레의 기척은 너인가 싶다가 나인가 싶다가 그렇게 달이 그때처럼 함께였다

시와 수필 2023.10.02

택시

내가 행복했던 곳으로 가 주세요 ㅡ박지웅 * 택시를 탄다면 어디로 가고 싶을까!? 부모님 아래서 부모님 영향으로 크고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만 살았던 때가 있었고, 경제적 독립으로 홀로서기가 되었다고 생각되었던 때도 있었다. 출가를 하고 30대였던가 아이들을 키우고 그 아이들이 장성해서 대학가로 분가하고 군입대 하고 그때도 그랬다. 이제는 아들들까지 홀로서기한 것 같은 때가 되었건만 그래도 나는 가끔 흔들린다 홀로 흔들린다 꽃에 흔들리고 바람에도 돌아보면 모든 시간은 행복하지 않기도 했고 행복하기도 했다 살아 있었으므로 매 순간 흔들렸다 택시를 탄다면 치아바타 샌드위치가 맛있는 그 카페에 가고 싶다 입이 터지도록 행복한 시간이 될 것 같다 다만 지금은.....,

시와 수필 2023.09.23

지우개

잘못 써내려 온 문장이 있듯이 잘못 살아온 세월도 있다 바닷가에 앉아서 수평을 보고 있으면 땅에서 잘못 살아온 사람들이 바다를 찾아오는 이유를 알겠다 굳은 것이라고 다 불변의 것이 아니고 출렁인다고 해서 다 부질없는 것이 아니었구나 굳은 땅에서 패이고 갈라진 것들이 슬픔으로 허물어진 상처들이 바다에 이르면 철썩철썩 제 몸을 때리며 부서지는 파도에 실려 매듭이란 매듭은 다 풀어지고 멀리 수평선 끝에서 평안해지고 마는구나 잘못 쓴 문장이 있듯이 다시 출발하고 싶은 세월도 있다 ㅡ송순태 *8월 마지막 아침 지우개를 써본지도 까마득하다 시간도 마음도 물처럼 흐른다 바람에 묻어오는 숲 향내와 새소리가 여름은 아니라고 지저귀는 듯하다

시와 수필 2023.08.31

원시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하지 마라 내 나이에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 멀어지는 일일 뿐이다 네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선 이제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 늙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다는 것이다 머얼리서 바라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ㅡ오세영

시와 수필 2023.08.11

다알리아

가을볕 째앵하게 내려쪼이는 잔디밭 함빡 피어난 다알리아 한낮에 함빡 핀 다알리아 시악시야, 네 살빛도 익을 대로 익었구나 젖가슴과 부끄럼성이 익을대로 익었구나 시악시야, 순하디 순하여다오 암사슴처럼 뛰어다녀보아라 물오리 떠돌아다니는 흰 못물 같은 하늘 밑에 함빡 피어나온 다알리아 피다 못해 터져나오는 다알리아 ㅡ정지용 시집, 『정지용 전집 1 시』, 민음사, 2016. ** 지용은 섬세한 언어의 소유자다 살던 시절의 방언들을 시에 그대로 남겨둔 시인 훅~~ 그 시절을 살아보진 않았지만 독특한 정서를 가져다주는 님이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 색색이 고왔던 꽃 열 살 무렵이었나 놀다가 놀다가 놀거리가 마땅찮으면 다알리아 목만 뚝 꺾어서 제기차기를 했었다. 가난한 집 맏딸처럼 속이 찼던 꽃 한나절을 차고 놀아도..

시와 수필 2023.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