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굼뜰에서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 70년대. 그 때는 마을앞 3번 국도를 오가는 차들이 귀했다. 그래서인지 차가 지나가면 한 줄로 서서 손을 흔들어 주는 손인사를 나누었다. 누가시킨 것인지 언제부터 그랬는지 모르지만 내 고향 구름뜰에선 어른도 아이도 모두 그렇게 하는 무언의 약속이었다.
비포장 도로였으니 먼지를 꼬리처럼 뽀얗게 달고 다닌 차는 오자마자 사라졌지만, 그걸 기다려 인사까지 건넸으니 운전수 입장에선 반갑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 흙먼지가 싫은 줄도 몰랐던 유년,산과 들, 논과 밭 움직이는 것은 없는 시골에서 산모롱이를 돌아 우리 동네를 순식간에 달려와 스쳐가는 그것은 엄청 큰 문명덩어리 였다.
이모부는 운전을 하셨다. 화물 트럭을 몰고 다니셨는데 얼마나 컸는지 3번 국도를 지나는 차 중에 이모부 차가 가장크다고 생각될 만큼 멋졌다. 내가 차를 보고 다른 친구들보다 손을 잘 흔든 것은 이모부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하교길, 아주 가끔 우리가 학교에서 우리동네까지 가는 이십분 남짓한 길에 이모부가 그길을 지나가는 시간과 맞딱뜨리는 행운이 더러 있었다. 이모부는 또래 중에 내가 있는걸 정확하게 알아보셨다. 어쩌면 아이들이 있으면 내가 있을까 속력을 낮췄을 것이다. 운전수가 이모부인가 싶으면 제동거리 때문인지 차는 몇미터 더가서 '끼익' 소리를 내며 멈추었다.
그때의 기분이란, 그리고는 반대편 조수석 차문을 열고 내 친구들을 한명 한명 태워주셨다. 차가 높아 우리 키 서너배는 되었는데 친구들이 예닐곱명 되어도 다 태워주셨고 트럭은 주막집 앞에 미끄러지듯 순식간에 도착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2-3분 거리였는데 그 높이에서 마을이나 들을 보는 풍경은 무엇에 홀린 순간이동같은 시간이었다. 그러고 나면 친구들한데 이모부가 얼마나 자랑스럽든지..
김천하면 기억나는 내 유년의 추억은 또 있다. 방학하면 3번 국도를 따라 이모집으로 완행버스를 타고 놀러갔었다. 이모집은 산골아이였던 내겐 가장 큰 대처였다. 유머 감각 뛰어 났던 이종사촌 오빠와 동생들은 숫기없는 나와 내 동생에게 얼마나 즐거운 시간을 마련해 주었는지, 김천만 가면 귀한 대접을 받았다.
긴긴 겨울 밤에는 이모부가 들어오실 때까지 화투치기나 윷놀이를 하며 놀았다. 저녁도 든든히 먹었지만 귀가 길에 주전부리를 사오시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 사오지 않은 날은 " 미애도 왔는데 맛있는 것 좀 사와라" 시며 돈을 주셨는데. 예의 이종사촌들은 기다렸다는 듯 달려가 호떡을 사왔다. 김천에만 있는, 김천가야 먹어보는 호떡, 이모부 사랑이 호떡처럼 달콤한 시절이었다.
그렇게 30년이 흘렀다. 동생이 김천시청에 볼일보러 가는 길이라고 해서 무조건 따라나섰다. 마침 계셔서 외출준비해서 기다려 달라고 부탁을 했다. 얼마만인지.! 이모 이모부도 많이 늙으신 듯 했다. 하기사 나도 불혹을 넘긴지 몇 년인가. 추풍령까지는 15분 정도 걸렸다. 황악산 가을 단풍이 어찌나 곱던지. 마음도 단풍으로 물들었다.
동생이란 넷이서 점심을 했다. 어릴적 먹었던 호떡얘기를 했더니 이모부 기억이 없다고 하셨다. 차를 태워준 일도.,,,, 그런가 보다, 베푼 사람보다 받는 사람이 더 오래추억하는 것,,, 못내 고마워 하시고 맛있게 드시는 모습에서 또 나는 얼마나 송구스럽든지.. 내 유년 친구들에게 자랑스럽고 뿌듯했던 이모부가 오늘은 함께여서 좋았다. 고맙다 하셨지만 추억할 수 있는 시간이있어 내겐 얼마나 정겨운 시간이었는지 두분은 모르실것이다.
2007,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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