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수필

구름뜰 2007. 12. 12. 11:46

 

 내 고향에는 눈이 많이 왔다. 창호지 저편이 유난히 희뿌연 이른 아침! 여늬 때보다 일찍 눈이 뜨여 여닫이 문을 열어 제치면 아! 세상은 눈부시게 하얗게 변해 있었다. 먼 산도 앞집 기와 지붕도 그 옆으로 지붕 낮은 초가도 눈으로 덮여 있었다. 우리 집 벽돌담 위에도 철 대문의 가늘고 뾰족뾰족한 살 위에도 여름이면 하얀 감 꽃눈을 장독대로 흩뿌려 주던 감나무에도 그 아래 장독대에도, 어느 곳 하나 빈틈없이 눈은 그렇게 온 세상을 덮고 있었다.  


  아직 이불 속에서 잠자는 동생들을 "눈왔다아!" 소리치며 깨운다. 후다닥 내복바람으로 마루에 나서면 마루가 높았던 탓일까. 그 반가움과 환호성도 잠시뿐, 방에서 보았던 풍경과는 판이하게 다른 우리 집 마당 때문에 금방 실망하게 된다.  어김없이 내 눈에 들어오는 마당은 흙과 함께 뒤범벅이 된 거무튀튀한 잿빛 두엄덩이같은 눈 더미 뿐이었다. 그런 눈 더미들은 마당 여기저기에  볼품없게 쌓여 있었다.   


 눈이 오면 누구보다 먼저 내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보고 싶었다. 동그랗게 발을 돌려 가며 예쁜 꽃 모
양도 만들고 손도장도 찍어 보고 눈사람도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소망들은 여지 없이 깨져 버리고 말았다 뜨락에서 화장실로 나서는 길도 벌써 깨끗하게 나있고 대문으로 나서는 길도 훤하게 나 있었다.


 눈이 오면 아버지는 이른 새벽에, 오실 손님이라도 있는 양 비질을 시작하셨다. 화장실로 대문으로 아랫집으로 그리고 윗집까지 그렇게 울타리 안팎을 싹 쓸어 내셨다. 그러노라면 아랫집 아저씨도 윗집 아저씨도 다 나오셔서 아버지와 함께 골목 눈을 쓸어 내셨다. 간 밤에 아무리 많은 눈이 내려도 우리가 일어 나서 밟아 볼 수 있는 눈이라곤 기껏해야 마당 저편 구석진 곳이나 무덤처럼 하얗게 봉분 모양을 한 무 구덩이나 대문을 나서면 보이는 빈 논바닥 뿐이었다. 


  어린 마음에 아버지의 부지런한 비질이 나는 늘 속상했지만  한번도 "아버지 왜  쓸어 내셨어요 좀 놔두시지"라고 물어 보지도 부탁하지도  않았다.  눈만 오면 의례껏 어른들은 비질을 했으므로 당연시하는 무언의 약속 같은 것인가 보다 했다. 우리집도 그랬고 골목길도 다른 집도 다 비질을 했으니 당연히 비질은 어른들의 몫인가 했다. 


  어린 나는 비질의 깊은 속내는 관심도 없었고 눈사람이나 눈싸움 등등 아이들과 놀 거리에만 신명이
났다. 어쨋거나 나는 그런 기회를 집안에서는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했다. 집안에서 안되면 밖에서 놀거리를 찾았다. 추수가 끝난 뒤 빈 논바닥은 바닥이 고르지 못하여 예쁜 발자국을 만들 수도 없었고 우리가 달려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사람들의 보행이 뜸한 고샅길 뿐이었다. 그것도 서둘러야 했다. 다른 집 아이들이 나와서 발 도장을 찍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어른들은 비질을 하느라 부지런 떨어야 했을 아침이 우리에겐 그 하얀 풍경만으로도 신이(신명)났기에, 밖으로 뛰쳐나와 놀았었다. 감홍시처럼 빨갛게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무엇이 그리 좋았던지. 


 그렇게 눈은 어른과 아이에게 각각 다른 모습으로 왔다. 눈 때문에 분주했을 어른이나 노느라고 더 바빴을 아이들에게도 눈은 추억거리였다. 하얀 발자국을 내고 싶었던 마음을 아버지가 한번도 알아 주지 않았지만 눈은 나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겐 겨울에만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 이었다
 눈이 오면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여전히 밖으로 나가고 싶어 안달을  한다.  나는 아이들 등살에 못
이겨서 젖어도 좋을 옷을 입히고, 면 장갑에 고무장갑을 겹으로 끼워서 내 보낸다. 놀 곳이라야 주차장이 되어버린 아파트마당이지만 옛날 장독대위의 눈이 유난히 깨끗했던 것처럼 차마다 소복소복 이고 있는  눈은 아이들이 눈뭉치를 만들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아파트 주차장주변은 한바탕 눈싸움하는 아이들로 야단이 난다.  위에서 내려다 보면 참으로 어릴 적 내가 놀던 모습과는 달라진 풍경이다. 
 고층 아파트 사이에 빼곡이 주차된 차, 그 위에 쌓인 눈만이 아이들에게 유일한 놀잇감이다. 그 수직공간에서도 너무 너무 즐거워하는 아이들 내 고향 마을의 아늑하고 넓고 평온했던 수평공간을 보여 주면 아이들은 얼마나 더 행복해 할까.


 TV에서 빙판길 뼈골절주의' 라는 제목의 뉴스를 보게 되었다. 내용인즉 '주머니에 손 넣고 걷지 말기' ''나이드신 분들은 되도록 외출을 삼가 할 것' 등의 주의 사항이었다. 빙판길이 된 서울 주택가 경사진 도로를 보행자들이 엉거주춤 조심하며 걷는 중에도 미끄러지는 모습 그럼에도 신이나서 눈 놀이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화면에 연신 지나간다. 아이들의 모습은 그 와중에도 신이 난 얼굴들이었다
 내 집 앞 눈을 내가 쓸어 내지 않기 때문에 '뼈골절주의'라는 제목의 뉴스도 나오는 구나 싶었다아버지의  비질이  참 지혜로운 것이었으며 그것이 바로 이웃 사랑인 것을 이제야 어렴풋이 깨닫는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는  눈이 오면 통행에 지장을 없을 만큼의 비질을 경비실과 관리실직원들까지 나서서 한다. 다른 사람은 어느 누구도 비질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응달이 깊고 넓어서 유독 오래도록 빙판으로 남는 모퉁이 길도 몇 군데 있지만 그다지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
 이제  아버지의 그 묵언의 비질처럼 눈이 오면 나도 빗자루를 들고 나서 보아야 겠다 나 역시 그 오래 가는  후미진 골목이 빙판으로 바뀌기 전에  그 부드럽고 하얀 눈을 쓸어 내야 겠다.

-이미애

  

한겨레 신문 2003년 1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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