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왔다 여기가 우리 집이야."
내가 중학교 2학년 이었던 1978년 겨울이었다. 우리 가족은 대구로 이사를 왔다. 처음 타 본 택시에서 내려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녹색 철 대문을 들이밀며 엄마가 내게 한 말이다.
기대 반 설레임 반으로 온 대구는 굉장히 커 보였다. 하지만 우리 집이라고 들어선 그 집은 마당없는 집이었다. 아니 마당은 있는데 어찌나 좁은지 대문을 열고 한 발짝 들어서면 신발을 벋고 마루에 올라야 하는 궁색하기 이를 데 없는 집이었다. 집안에서는 하늘을 볼 수가 없다 두어 평 남짓한 마당은 지붕에서 담장까지 투명한 슬레이트 빗물받이를 걸쳐 놓았기에 비가와도 한방울 떨어지지 않는 햇볕 또한 들지 않는 곳이었다. 그렇게 못 마땅한 집에서부터 각박한 도회지 생활이 시작되었다.
학교에서도 생활도 그리 순탄치 못했다. 전학 온 첫날, 수업 중 지우개가 보이지 않아서 아무 생각없이 책상 위에 놓인 짝의 지우개를 썼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쉬는 시간 그 짝은 자기 것도 아닌데 물어보지도 않고 허락도 없이 쓴 내게 따졌다. 나는 할말이 없었다. 시골에서는 니것 내것 개념이 없이 살아온 것이었다. 지우개든 칼이든 연필이든 쓰는 중이 아니라면 누구든 썼으며 그것을 굳이 허락받아야 허락해 주어야 한다는 개념이 전혀 없었다.
시골에선 엄마도 아버지도 다 그랬다. 해거름이 되어도 들에서 돌아오지 않는 부모님을 찾아 나서면, 남의 밭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우리 밭은 다 끝내고 오시던 중 남의 일이 다 끝나지 않은 경우면 그 밭으로 들어가서 함께 거드는 것이다. 그냥 지나쳐 오지 못하는 것이다. 옆집 소가 있으면
'이놈아 비켜라' 개가 따라오면 '이놈아 절로 가' 이렇게 지내 왔던 정서였기에 내 도회지 생활은 삭막하기만 했다.
부모님도 아마 더 힘드셨을 것이다. 신접 살림 난 고향집에서 15년을 사시며, 농사짓고 누에 치며 돼지 기르며 농한기에도 쉬지 않고 열심히 살아오셨다. 그렇게 애면글면 모아오신 논 열두마지기 중 열마지기를 팔아 대구에 16평짜리 집을 장만하신 것이다. 2남2녀 커오는 자식들 공부 때문에 두마지기는 소작농으로 남겨 두셨다. 쌀 걱정을 들기 위해서였다.
부모님은 돈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다 하셨다. 시골에서도 남의 집 짓는 일은 도맡아서 하셨던 아버지는 미장기술자가 되어 건축현장으로 다니셨고 어머니 또한 그 시골에서의 성실함 그대로 도회지 생활에서도 최선을 다 하셨다.
돈이 조금씩 모이기 시작했고 몇년지나지 않아 작은 한옥을 한 채 샀다. 그 집으로 이사가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엄마는 그 집은 세 놓고 계속 그 마당없는 집을 고수하셨다.
그러기를 한 오년 우리가족은 두 집을 다 팔아 53평짜리 2층 양옥집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 때의 기쁨이란, 엄마와 함께 그 마당 있는 새집을 처음 보러 갔던 날, 그집 마당에는 커다란 호두나무와 빨갛게 영근 감나무가 있었다. 너무 행복했다. 드디어 마당있는 집이 생긴 것이다. .
한달쯤 뒤 우리가족이 그 집으로 이사 갔을 때는 그 호두나무도 감나무도 베어지고 없었다. 그 마당은 양옥집 아랫채로 바뀌어 있었다. 화장실과 방 2칸 부엌2칸으로 그렇게 셋방목적의 방이 들어서 있었다.
어렵게 마련한 큰 집이니 어떻게든 모자라는 돈을 방세로 보충할 요랑 이었던 게다. 아버지의 뛰어난 건축기술까지 발휘하여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막아버리고 어느새 2층도 부엌 3칸 방3칸으로 개조되어 있었다. 1층에는 온전히 우리식구만 사는가 했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방 1칸을 뒤편으로 대문을 내고 출구를 만든 것이다. 그렇게 방 여섯 칸을 세놓고 들어가 살게 된 우리 집 마당은 예전보다는 훨씬 좋아졌지만 그래도 내 맘에는 늘 아쉬운 마당에 대한 미련은 남는 그런 집이다.
그래도 그 집은 예전의 마당없는집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었다. 부모님은 통로주변 담 벽 밑에는 포도나무를 심었고 대문 옆에는 단감나무를 심었다.
그 곳에서 부모님은 지금까지 노후를 편안히 보내신다. 막내까지 공부를 잘 마칠 수 있었던 것은 그 마당없는 집에서 잘 일궈 낸 살림덕분이며 그 집이 복 많이 얻은 집이라고 하신다.
노후를 방세에서 100% 해결하게 된 지금 부모님은 마당없는 집에서의 고생을 추억으로 삼으시며 행복하게 사신다. 지금 친정에 가면 여전히 마당은 넓지 않다. 하지만 포도는 따먹고 단감까지 따먹을 수 있는 친정집은 노후를 잘 설계하신 부모님의 현명함 덕분임이 분명이다.
2003년 한글 백일장
시제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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