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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수필 '외가'- 3 고욤

구름뜰 2007. 12. 13. 10:25

    내 고향은 집성촌이라 일가가 한 마을에 살았다. 버스를 타고 가는 외가는 설렘 그 자체였다. 신작로에 누런 흙먼지를 내며 달리는 버스를 기다리는 일도 버스에 올라 덜커덩거리며 가는 일도 즐거움이었다. 버스가 외가마을 주막집 앞에 우리를 내려 주고 훅 먼지를 뿌리며 산 모롱이를 돌아갈 때까지 버스는 내게 출렁이는 기쁨을 선사했다. 


 외가는 먹거리가 푸짐했다. 외할머니가 먹을 것을 잘 쟁여 두는 편이기도 했지만 외삼촌이 무엇이든 능큼능큼 먹어 치우는 우리와는 달리 입이 짧았던 탓이기도 했다. 먹거리들은 주로 정지간 안에서만 통하도록 된 광에나 안방 벽장 속에 있었다. 덕분에 나와 동생은 외가에만 가면 도랑에 든 소처럼 호강을 했다. 


 가마솥 아궁이 불잉걸을 보고 있노라면 외할머니는 광에서 밤을 몇 톨씩 쥐고 나와 구워 주셨다. 생밤은 앞니로 보늬를 갉아 내도 텁텁하고 떫은맛이 입안에 남지만 군밤은 껍질이 일거에 벗겨져서 노란 알밤을 한 입에 톡 틀어넣으면 고소한 맛이 입안 가득이었다. 언젠가 외할머니 몰래 광을 뒤졌지만 밤을 찾을 수가 없었다. 벌레 슬고 마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항아리에 모래를 넣고 그 속에 밤을 묻어 두는 걸 몰랐던 것이다.


 안방 벽장에는 호두, 곶감, 오징어 때로는 떡까지 있었다. 여름에는 깊은 산에 가야 딸 수 있는 머루랑 다래도 있었다. 다래를 처음 보았을 땐 초록색 열매가 생소해서인지 얼른 손이 가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입에 넣어 주셔도 설마 했지만 깨물고 보니 그 새콤달콤한 맛에 금방 반하고 말았다. 산에 이렇게 맛있는 열매가 있다니! 맛이 없는 풋것도 반나절이나 하룻밤만 지나면 말랑해져 손끝으로 골라 먹는 재미도 여간 아니었다. 그런 먹거리들은 오롯이 외할머니의 정성과 사랑이었음을 잊을 수가 없다.  

 
 외가의 먹거리 중 가장 특이했던 것은 고욤이다. 외갓집 뒤란 돌담 안에는 고욤나무가 있었다. 나무는 볼품 없었지만 가늘고 긴 가지마다 오종종하니 해마다 고욤이 풍년이었다. 고욤은 크기와 모양이 도토리와 비슷했다. 덜 익은 것은 누렇다가 다 익으면  갈색빛을 띄는데 작은 열매 속에 씨가 가득 들어 과육은 별로 먹을 것이 없었다. 익으면 홍시처럼 달았지만 쉬 물러졌고 생으로는 떫기가 땡감보다 더해 먹을 수가 없었다. 이것을 외할머니는 오지항아리에 차곡차곡 재워 두셨다. 떫은 감이 홍시되듯 시간이 지나면 숙성이 되었다. 그것을 잘 으깨어 두면 얼기설기 살얼음이 끼는 것이었다.   


 긴긴 겨울밤 외할머니는 반쯤 언 고욤을 한 종지씩 퍼다 주셨다. 고욤 한 숟가락을 입안에 떠 넣으면 머리통이 얼얼하도록 시원했다. 달고 끈끈해서, 쫀득쫀득하고 뻑뻑해서 잠시 말도 못한다. 홍시에서는 느낄수 없는 맛이다. 까만 고약같은 고욤을 초콜렛 아이스크림처럼 먹을 수 있다면 오죽 좋으랴만 씨를 발라내는 번거로움 때문에 성질 급한 사람은 일찌감치 먹는 것을 포기하기 십상이다.

그저 오물오물 씨앗을 발라내는 더딘 작업뿐, 발라내기 힘들다고 확 뱉어 버리면 먹을 것이 없는 셈이지만 씨앗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발라내다 보면 볼태기가 얼얼해지기도 하지만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분량도 제법이었다. 참 맛을 즐기려면 천천히 뺨과 혀와 치아의 적절한 협조로 열심히 씨를 발라내며 먹는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밤마다 고욤을 한 종지씩 먹었지만 외삼촌은 먹지 않았다. 까탈졌던 외삼촌에게 한 종지 먹고 나면 씨앗이 반종지나 나오는 고욤은 당연히 귀찮은 음식이요 성의도 없고 음식같잖은 음식이었으리라!


 외가에는 감나무도 참 많았다. 워낙 오래된 큰 나무들이라 장대로 따는 일도 힘들었다. 서리만 내리면 외할머니는 '감을 따얄텐데' 타령이셨지만 외삼촌은 귓등으로 흘리셨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연례행사처럼 감 따러 갔다. 감 때문에 잔소리 듣는 외삼촌을 보면서 '내가 조금만 크고 힘이 세다면 저 맛있는 감을 실컷 딸 텐데'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장대무게 하나 만으로도 내겐 버거웠다. 그래도 떨어진 감을 소쿠리에 담거나 터진 감홍시나마 먹는 재미로 감나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게으른 외삼촌 덕분에 외가의 감나무는 유난히 까치밥이 많았다. 새들에겐 일용할 양식이 그 만큼 넉넉했으리라.  


 곶감도 많이 만들었다. 하얀 시설(枾雪)이 피어나 곶감으로 완성되기까지는 제법 시일이 걸렸다. 외할머니 몰래 빼먹는 미완의 곶감. 아직은 가을볕에 알몸을 익히고 선들바람에 물기를 말리는 중이지만 그 말랑쫄깃하게 씹히는 감촉이며 입안에 녹아나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란! 


 감씨를 심으면 고욤나무가 나다고 한다. 감에서 고욤이 나왔지만 고욤으로는 감나무가 되지 않아 고욤나무 줄기를 째서 감나무 가지를 접붙여야 그 이듬해부터 감이 열린다고 한다. 줄기에 접붙이지 않고 가지에 접붙이면 한 나무임에도 그 가지에만 감이 열리고 다른 가지는 그대로 고욤이 열린다고 한다. '일흔 고욤이 감 하나만 못하다'라는 속담도 있으니 한 뿌리지만 다른 결정체로 나타나는 감과 고욤을 보면서 사람 사는 이치로도 쓸모 있고 없음을 이른 말 인것 같다.   


 외할머니는 떠나셨지만 나는 여전히 외가 가는 일이 좋다. 가을이면 처마아래 곶감도 그대로이고 장독대 고추장항아리에 박힌 더덕 맛도 그대로이고 철마다 나는 산나물이며 고들빼기김치, 능이버섯 무침까지 곰삭은 맛이든 금방 버무린 맛이든 외할머니 이상의 맛을 내시는 외숙모가 계시기 때문이다.
 고욤이 제 살을 찢고 새살을 맞아 감으로 거듭나듯이 외할머니 떠난 자리를 지키며 외숙모가 어느새 주렁주렁 달린 감을 수확하며 우리를 반기는 모습은 외할머니의 그것과 꼭 같다

 

2003년 월간 수필쿤학 5월호 초회추천작

2003년 구미수필 창간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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