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수필

연작수필 '외가'- 2 저푸른 초원위에

구름뜰 2007. 12. 13. 10:31

                                                                                       
 '굼뜰 촌놈들 왔냐? 고향마을이 '구름뜰'의 준말인걸 나는 최근에 알게 되었다.
 외가에 가면 외삼촌은 시답잖은 말투로 나와 동생을 맞이했다. 우리가 촌놈인 건 사실이지만 외삼촌도 촌에 살면서 굳이 그렇게 불러야 한단 말인가. 중학생이 되고 우리 가족은 대구로 이사를 했다. 이듬해 여름, 교복을 단정하게 입고 굼뜰촌티를 벗은 당당함으로 시골 외가를 찾았다. 나는 외삼촌이 '촌놈' 대신 우리를 어떻게 반길까 내심 기대를 했다. 그러나 외삼촌은, 
 "대구 촌놈들 왔냐?"
 여전히 우리를 촌놈으로 몰았다. 우리는 분명 도시에 살고 외삼촌만 여전히 촌에 살면서 우리더러 '대구 촌놈'이라니. 하지만 외삼촌의 그 말속에는 '촌에서 제일로 반가운 놈들'이란 뜻이 담겨져 있고 그래서 우리는 사는 곳과는 상관없이 외삼촌에겐 영원히 촌놈일수 밖에 없단 걸 나이가 들어가면서 알 수 있었다. 


 나는 외삼촌이 철부지같은 치기는 부렸지만 아름다운 청년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순전히 '저 푸른 초원 위에' 때문이었다. 외삼촌은 자주 노래를 흥얼거렸는데 '저 푸른 초원 위에' 였다. 나는 사물에 문리가 트이기도 전인 대여섯 무렵부터 이 노래를 들었다. 노랫말이 너무나 아름답고 외삼촌과 잘 어울렸기 때문에 당연히 외삼촌 노래인줄 알았다. 외삼촌이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파란 하늘과 맞 닿을 듯한 초록 언덕 위에다 달력 같은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그림같은 집을 짓고 멋진 인생을 살 거라고 생각했다.  


 또 한곡, 내가 듣기에는 좀 난해한 노래가 있었다. 전반부에서부터 강한 의문문으로 시작되는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하는 소절 뒤에,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라고 답을 알려 주는 노래다. 이 곡은 특히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하는 그 애끓는 물음은 답을 몰라서 묻는 듯하기도 하고, 모르는 이에겐 알려 주려는 듯해서 들을 때마다 귀가 솔깃해져 들어보면 언제나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였다.  나는 그 '눈물의 씨앗'이 무엇인지는 잘 몰랐지만 사랑의 답이란 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외삼촌의 애창곡에서 세뇌가 되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사랑이 무언지 아는 사람?"
 확실하게 답을 알고 있었지만, 아이들은 멀뚱멀뚱 아무도 손들지 않아서 나도 시치미 뚝 떼고 있었다. 분위기상 모르는 척 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순간적인 판단이었다. 잠시 후 선생님께 들은 사랑은 내가 알고 있는 '눈물의 씨앗'과는 영 딴판이었다. 그럼에도 다행이란 생각이 먼저 든 건 내게 뻗칠 망신살을 막았다는 것이다.   


 나는 외삼촌이 결혼해서도 여전히 외가에서 외할머니와 같이 사는 이유도 알았다. 그렇게 살기 위해 그런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니고 단지 노랫말일 뿐이었다는 것을. 그 사건을 정점으로 내 여린 감성을 자극하며 기대를 모았던 노래들에 적잖이 실망했고 '저 푸른 초원 위에'에서 오는 감흥은 더 이상 없었다. 말장난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눈물없는 울음처럼. 그래도 외가만 가면 여전히 외삼촌은 라디오를 끼고 살았고 카세트라디오가 생기면서부터 테이프에 두 곡만 내리 녹음해서 듣기도 했다. 나는 서서히 지겨워졌다.   


 언제부터인지 외가에 가도 외삼촌은 촌놈이라는 호칭을 쓰지 않는다. 동생도 그 소리가 어릴 때는 그렇게 듣기 싫었지만 요즘은 그립다고 한다. 외삼촌이 우리더러 촌놈이라고 했던 것은 아마 우리들이 출가하기 전까지였던 것 같다.   


 지난여름, 우리가족과 동생가족이 외가에 갔었다. 마을 앞 개울이 워낙 시원하고 깨끗해 한여름이면 더러 찾는 편이다. 외삼촌은 아침 일찍 개울물에 통발을 던져 두고 자리까지 잡아 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아이들과 물놀이 하며 놀았는데 외삼촌은 통발에 들어온 물고기가 우리나라 특산종으로 일급수에만 사는 '동사리'라며 아이들에게 보여 주었다.  개울가에서 나는 뜬금없이 물었다.
  "외삼촌, 요즘도 저 푸른 초원 위에를 좋아하세요?"
  "옛날엔 참 많이 불렀지......"  

  "......"

  먼 하늘을 바라보는 외삼촌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고인이 된 외할머니 생각으로 내 눈까지 더워지고 있었다. 


 이젠 노경에 접어든 외삼촌은 여전히 당신이 태어난 그 집에서 살고 계신다. 마을 옆으로 도로가 크게 생겼고 농가들도 개조를 해 옛날 모습을 찾을 수가 없지만 외가는 여전히 옛날 그 자리에서 그 기와를 이고 있다. 겨울이면 엉덩이가 뜨끈뜨끈해지는 시커먼 아궁이도 그대로다. 


 초원 위의 그림같은 집은 아니지만 외삼촌은 영원히 그 집을 떠나지 않으실 것 같다. 외삼촌의 노랫말을 믿었던 것은 내가 어려서라기 보담 외삼촌의 정서가 노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생각도 든다. 예전에 우리 보고 촌놈이라던 외삼촌이, 이제는 '촌에 가면 제일로 반가운 촌사람'으로 머물러 계시니 외삼촌은 언제까지나  마음의 고향이다.

 

2003년 구미수필 창간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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