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가 떠났다. 그런데 무언가 허전하다. 그녀가 떠나간 때문인지 내 안에서 무언가 빠져나간 것인지 까닭 모를 일이다. 일순! 정수리를 내리치는 허전함의 실체는 빈손이었다. 분명 내 손에 있어야 할 원고뭉치가 사라진 것이다. 순식간에 먹구름이 내 가슴에 뭉글뭉글 똬리를 튼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침착해야 한다. 30여분 전의 기억을 차근차근 더듬어 본다. 사무실을 나설 때 분명 그것은 내 손에 있었다. 열쇠로 문을 잠그고 곧바로 친구와 함께 버스를 탔다. 차안에서는 줄 곳 수다로 들떠 있었고 함께 차에서 내렸고 친구는 떠났다. 생각없이 들떠 있는 동안에 내 손에 있어야 할 원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어디에 있을까. 버스에, 아니면 원고를 주웠을 누군가의 손에, 이렇게 엄청난 일이 내 실수로 일어나다니! 생전 처음이다. 이렇게 참담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
동인지 출판을 앞두고 지도선생님과 십여명의 회원들이 심혈을 기울여 본 교정원고다.
출판되기 이전의 단 한 권 뿐인 미완의 책, 묶지만 않았을 뿐 목차며 페이지까지 매겨진 책이었다. 낱장으로 한 장씩 나눠서 또박또박 되짚어 가며 본 것이다. 얼개나 맞춤법, 오자, 반점, 온점, 홑 따옴표, 겹 따옴표 등 활자화 되어 버리면 다시는 고칠 수 없기에 보고 또 본 원고, 서캐 훑듯 온종일 교정을 본 원고가 없어진 것이다. 사무실을 나서며 얼마나 뿌듯했던가. 하루를 참 충실하게 보냈다는 뿌듯함과 전체회원의 1년 동안의 결실인 동인지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까지 훈훈하지 않았던가.
아무래도 버스에 두고 내린 것 같다. 친구의 자리를 잡아 줄 요량으로 원고봉투를 옆자리에 놓은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 일말의 희망과 함께 더욱 초조해졌다. 버스회사에선 차량도 기사의 휴대폰 번호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종점이 같은 버스에 무작정 올랐다. 혼이 반쯤 빠진 듯한 내가 딱해 보였던지 버스기사는 이리 저리 연락해본 끝에, 내가 탔던 버스가 돌아 나오는 장소쯤에 맞춰서 나를 내려 주었다.
언제 밤이 되었는지 방향감각만 있을 뿐 캄캄하다. 낯선 시골의 짙은 어둠은 내 안의 먹구름쯤이야 일찌감치 잠식한 듯하다. 어둠은 이제 나의 분별력쯤은 아무 것도 아니란 듯 이젠 나를 통째로 삼킬 듯 내 주변을 웅숭거리고 있다. 울고 싶다. 이 시간에 이 상황에 서있는 자신이 한없이 서글프기 짝이 없다.
돌아 나오는 차, 내 원고가 있어야 할 그 차에 올랐을 때 의자 시트는 군청색이었다. 암만 생각해도 나는 고동색시트에 앉았었는데, 긴가 민가하는 내 의구심에 쐐기를 박은 건 아저씨의 기억력이었다. 우리가 탄 정류장과 친구의 검정색 옷차림까지 친구가 동전 찾느라 차비를 늦게 낸 것까지 놀랍게도 다 기억해냈다. 하지만 종이 한 장도 본적 없다는 아저씨, 원고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어둠보다 더한 동굴 속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버스에 놓고 내린 것이 아닐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은 그 버스에서 완전히 절망을 맛 본 다음, 기진 맥진 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였다. 혹시 문을 잠글 때 바닥에 잠깐 놓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절박한 상황에서 무어라도 붙잡고 싶은 나에게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사무실 가까이에 있는 회원에게 전화를 했다. 그녀가 가장 빠르게 달려가 볼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전화기 저편에서 혼비백산 한 나를 짐작한 듯 달려가 보겠노라고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손 바닥에선 연신 땀이 배어나고 있다. 나는 그녀의 발걸음을 쫒아 택시보다 더 빠르게 달려가고 있다. 휴대폰도 땀을 흘리고 있다.
"웬 일이니, 원고가 여기있네," 아! 이럴 수도 있는 거구나. 여간해선 흥분하지 않는 그녀도 얼마나 달렸는지 숨을 헐떡인다. 정말, 정말, 정말이냐는 그 말 외에는 더 이상 할말이 떠오르지 않았고 참아 왔던 울음이 터졌다. 그녀가 하늘만큼 땅만큼 보다 더 고마웠다. 누군가 '당신은 나의 구세주요' 라고 외치고 싶은 기분이 든다면 꼭 이런 경우일 것이다. 택시기사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내 상황에만 골몰해 있던 나는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차비는 냈는지 집에는 어떻게 들어 왔는지 필름끊긴 사람처럼 지금까지도 기억은 없다.
못 찾으면 밤새워서라도 교정을 봐 줄 거라며 걱정 말라던 친구, 그의 따뜻한 위로는 원고를 찾기 전에는 귓전에서 윙윙 맴돌기만 하더니 찾고 나니 더욱 사무치게 고마운 것은 이 무슨 조화인가. 아! 그럼에도 차마 버스에서 찾았노라고 말하고 싶은 이 심정.
내 의식의 오류는 나를 완벽하게 그 오류 속에 가둔 것이다. 더 이상의 객관적이 사실까지도 의심해 볼 수 없었다. 자리잡는다고 놓은 것은 원고봉투가 아니라 누런 내 핸드백이었고 고동색시트는 지극히 주관적인 내 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던 버스 시트에 대한 선입견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럴 리가 없을 거라며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곳에서 답을 찾은 것이다. 내 눈으로 분명 보았다고 생각한 것은, 내 주관적인 관념은 모두 헛 것 이었다. 한치의 의심도 없는 확신, 그것에서 오는 엄청난 오류!
살다가, '어떻게 이런 일이 나에게' 라고 생각되는 순간이 온다면 한 번 되짚어 볼 것이다. 내 생각이 잘못되어 내 마음이 상상한 틀에 끼워 맞춘 건 아닌지. 나는 절대로 오류를 범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내 오류일수도 있으며 그래서 내가 나를 궁지로 몰아 넣는 우를 범하고 있는 건 아닌지.
2004년 구미수필 2집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