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투명한 아침, 노인 한 분이 우리 아파트로 걸어 오고 있었다. 두루마기 차림의 풍채가 영락없이 시아버님이셨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오실 리가 없단 생각에 그 노인이 우리 집 앞에 다다를 때까지 나는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아버님은 늘 두루마기차림에다 워낙 훤칠하신 터라 멀리 서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지만 그 아침엔 유난히 눈부신 햇살을 등진 탓이었다.
새벽 첫차를 타고 오신 듯 했다. 달려 나온 내게 검정 비닐봉지를 내미셨다. 새벽에 애벌 끓인 듯한 민물고기가 냄비 채로 들고 오신 것이다. 물고기를 집으로 가져 오신 것은 처음이었다. 시골집 앞 개울 소(沼)에 물고기가 다 말랐을 거라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물고기의 양이 많아서가 아니라 아버님의 말씀에서였다.
"야야, 내가 아무래도 몸이 좋지 않다."
많이 참으시다가 병든 몸을 의탁하러 오신 길이 분명했다. 그 아침나들이가 내 불길한 예감처럼 아버님께서 고향집을 떠나 온 마지막 행보였다.
아버님께선 낚시를 즐기셨다. 남편도 마찬가지다. 가끔 손 맛을 강조하지만 궁극에는 매운탕이 목적이다. 안타까운 건 물고기가 입질을 꺼려하는 건지 낚시에 소질이 없는 건지 결국은 손 맛을 보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낚시의 기본인 기다림 곧 참을성도 부족한 편이다. 그럼에도 남편은 물만 보면 가던 길을 멈추고 물가를 기웃거리다 돌아서는 경우가 다반사다.
남편이 말하는 손 맛이란 그야 말로 낚시 자체를 즐기는 일이다. 옛날 강태공은 자연을 벗삼아 미끼도 없는 낚싯대를 드리우고 세월을 낚았다지만 미끼 없는 낚싯대를 본 적이 없으니 그건 고사에나 나옴 직한 얘기일터이다. 손 맛으로 만족하는 조사(釣師)들이 아름다운 건 떠날 때는 미련없이 초망에 든 물고기를 모두 놓아주는 초연함 때문이다. 물 밖 사람의 심사까지 꿰뚫고 영광스럽게 조사(釣師)의 손 맛을 더해주기 위해 풀려 날것을 알고 입질을 하는 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그 날도 우연히 저수지를 지나다 낚시 기운이 발동한 참이었다. 탄성을 자아내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온지 한 시간 남짓 되었다는 아주머니의 초망엔 큼직한 물고기가 수십 마리는 됨 직했다. 아이들이 자석 낚시로 쇠붙이를 뽑아 올리듯 하는 그런 낚시는 생전 처음 보았다.
손 맛에 굶주린 남편이 그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한번만, 꼭 한번만 해보고 싶다는 간절한 눈빛을 아주머니는 거절하지 못했고 선뜻 낚싯대를 넘겨 주었다. 남편은 마치 수상자가 벅찬 기쁨을 누르고 자기 차례의 호명을 기다리듯이 그런 설렘에 긴장까지 섞인 얼굴이었다. 드디어 때가 왔다는 기대감, 남편도 나도 찌에다 시선을 꽂았다.
"...... ."
감감무소식!
물고기들도 사람을 알아 보는 것인지, 수면은 시간이 정지한 듯 고요했다. 서서히 나까지 초조해지고 남편이 초라하고 불쌍해 보일 정도였다. 결국 20여분을 기다리다 아주머니의 리듬까지 깰 것 같아 우리는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나 왔다.
바다를 보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회(膾) 이고 저수지나 냇물만 보아도 매운탕에 회(蛔)가 동(動)하는 사람, 그나마 다행인 건 음식이야 식당에서 해결할 수 있지만 그 손 맛은 어찌해볼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는가. 장소에 상관없이 호락호락 잡히는 눈먼 물고기가 없건만 남편은 여전히 미련을 못 버린다. 솔직히 나는 불쌍한 물고기들 때문에 미끼 값도 못하는 남편의 솜씨가 앞으로도 계속 변함없기를 바란다.
노년의 한가로움을 낚시로 보내는 시간이 많아서 인지 오랜 경험 덕분인지 시아버님의 낚시 솜씨는 남편보다 월등했다. 아버님은 잡은 물고기를 자연상태로 저장하시는 지혜도 남달랐다. 텃밭가로 흐르는 조붓한 개울에 소(沼)를 만들어서 그 속에 풀어 놓았다. 계곡에서 갈라진 그 개울은 사시사철 물이 잘잘잘 흘렀다.
시골에 가면 남편과 아이들은 제일 먼저 그 곳으로 달려갔다. 소(沼)에는 언제나 여러 가지 물고기가 놀고 있었다. 마치 제 집처럼. 그 소(沼)의 물고기는 아버님께서 자식을 위해 준비하는 사랑이셨다. 남편이 매운탕을 좋아하는 것도 그런 아버님의 사랑을 먹고 자란 때문이지 싶다.
아버님은 말기암판정을 받으신 후 1년 남짓 투병하시다 떠나셨다. 아버님이 그 아침에 마지막으로 들고 오신 양은 냄비는 아버님을 가장 생생하게 느끼게 하는 유일한 유품으로 내게 남았었다. 기운이 많이 쇠하신 몸으로도 매운탕을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종일 낚시를 하셨을 아버님. 백발의 아버님은 강태공보다 더 아름다운 낚시를 하신 것이다.
새 아파트에 이사와서야 나는 그 양은냄비가 없어진걸 알았다. 워낙 낡았던 터라 이사 올 때 누군가가 버렸을 거라는 짐작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양은냄비를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죄스러움마저도 잊은 채 산다. 남편이 자신의 입맛의 근원이 부모님의 사랑인줄을 모르고 사는 것처럼. 스스로 부모이면서도 제 부모님의 사랑은 잊고 살기도 하고 모르고 살기도 하는 것 같다.
2004년 구미수필 2집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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